A PLAY
김균형 작
CopyrightⓒKGH, 2014
등장인물
혜숙 유명 여배우
효진 배우 지망생
쏘리 배우 지망생
보희 가수 지망생
남자 다역 (트레이너, 햄릿, 후배, 감독, 경찰, 보희 아빠, 효진 아빠, 로미오, 제작자, 철수)
트레이너
무대
어떤 연예 기획사 연습실
1
음악 흐르며 조명인 되면 효진 무대 위에서 혼자 열심히 연습 중이다. 잘 못한다.
효진
폐하와 장군께서 이리로 오시고 있다고? 알았다. 굉장한 소식이로구나. 까마귀까지도 목쉰 소리로 덩컨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고하는 양 저렇게 울어대는구나! 자, 너희들 살인의 음모에 따르는 악령들아, 어서 와서 나의, 이 여자의 마음을 없애 버리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소름 끼치도록 잔인한 마음으로 가득 차게 해다오. 전신의 피를 혼탁하게 하여 연민의 정이 얼씬도 못 하게 하고 양심의 가책이 나의 흉악한 결심을 뒤흔들거나, 혹은 그 가책으로 인해 실행을 단념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다오. 보이지 않는 형체를 하고 언제 어디서나 인간의 재앙을 돕는 살육의 정령들아, 내 몸 안으로 와서 내 젖을 담즙으로 바꿔 다오! 자, 오너라, 캄캄한 밤이여! 어서 와서 지척을 분간키 어려운 캄캄한 지옥의 연기로 장막을 드리우고, 나의 단도가 스스로 저지른 상처를 보지 못하도록 해다오. 그리하여 하늘도 그 검은 장막 속을 들여다보고 ‘안 돼! 그만두라니까!’하고 외치지 못하게 해다오!
트레이너(남자)
(객석에서 답답하게 지켜본 후에) 오케이. 잘했어. 그런데 말이야 조금 약하지 않니? 좀 더 뭐랄까. 이 여자의 감정이나 뭐 이런 것들이 네 말에 실려 있어야지. 네가 원래 스타일이 조금 약해. 그렇지만 약하다고 언제나 약한 것만 할 수는 없지 않겠니? 그러니까 좀 더 강한 것도 한 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이런 무거운 대사를 연습 해보라는 거야. 알겠지? 자 강하게! 다시 한 번 해보자.
효진
예. 폐하와 장군께서 이리로 오시고 있다고? 알았다. 굉장한 소식이로구나.
트레이너
잠깐. 그런데 너 지금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소리지?
효진
네? 예.
트레이너
어디 이 이후에 무슨 일이 있어?
효진
이후요? 그건 모르겠는데요.
트레이너
몰라? 그럼 이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효진
아니오. 그것도.
트레이너
(꾹꾹 눌러 참으며) 누군가 너에게 그런걸 알아야 한다고 얘기한 사람 없었니?
효진
네. 없었어요.
트레이너
없었다고?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럼 내가 얘기해 줄게. 대사를 받으면 말이야, 항상 그 대사 이전에 어디에서 무얼 했고 또 이후에 어디에서 무얼 할지를 꼭 파악해 놓아야 한다. 알았지?
효진
예.
트레이너
그렇다면, 설마, 너 이 대사가 어느 대본에 나온 얘긴지는 알겠지?
효진
아니오.
트레이너
아니오? 그럼 누군가 너에게 “대사를 받으면 반드시 그 대사가 속한 작품을 찾아 읽고 인물에 대하여 분석을 해야 한다”라고 얘기는 하지 않았니?
효진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했던 것 같아요.
트레이너
했던 것 같다고? 그러니까 했다는 거지?
효진
그런 것 같아요.
트레이너
그런 것 같다고? 그러니까 했다는 거잖아.
효진
예.
트레이너
했지? 분명히 했지? 그런데 안 읽었다는 거지? (폭발하며) 너 왜 하라는 대로 안 하는 건데, 응? 야, 여기 앉아있는 네 후배 연습생들도 다 알아. (관객들에게) 이 대사 어느 대본에서 나왔죠? 거 왜 셰익스피어의? (묻고 누군가 대답 한다. 관객의 반응에 따라 적적하게 진행한다.) 봐. 저 연습생도 알잖아. 그런데 너는 몰라? 누구 얘긴지도 모르고 말을 한다고?
효진
(대답한 사람에게) 이게 맥베드에요? 저도 맥베드 읽었는데, 이런 부분은 어디였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어떤 부분이에요?
대답을 기다린다. 관객의 설명을 약간 듣고.
트레이너
(관객에게) 감사합니다. 이제야 알겠니? 지금 네 남편이, 자기가 죽일 왕을 데리고 오고 있고, 그 왕을 오늘 밤에 이 궁에서 반드시 찔러 죽이려고 칼을 갈고 있는 장면이잖아. 알겠어?
효진
죄송합니다.
트레이너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네. 어떻게, 네가 말을 하는데, 네가 누구고 어떤 상황이고 이전에는 어디에 있었고 앞으로는 무얼 할지를 모르고 말을 할 수가 있다는 거니? 네 생각에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효진
죄송합니다.
트레이너
상식적으로 생각 좀 해봐라. 예를 들어 네가 방을 나가면서 “조금 있다가 봐”라고 한다고 치자. 그런데 문 박에서 너를 기다리는 건 너의 목을 달라는 적들이야. 즉 너는 나가면 죽어. 그런 상태에서 하는 “조금 있다가 봐”와 그냥 친구 만나러 나가면서 가족들에게 얘기하는 “조금 있다가 봐”가 어떻게 같을 수 있니?
효진
죄송합니다.
트레이너
정말 이해를 할 수 없네.
효진
죄송합니다.
트레이너
너 그럼. 저 대사의 내용은 이해하니?
효진
그럼요. 그러니까 아이가 돋보기로 빛을 모아 개미를 죽이는 그런 잔인함이 있는
트레이너
뭐라고?
효진
그러니까 하이에나가 사자의 먹이를 노릴 때의 그 예리함이
트레이너
뭐?
효진
그러니까 그 늑대가 나타났다고 두 번이나 거짓말했던 양치기의 양들이… 늑대들이… 그 잔인함… 죄송합니다.
트레이너
나가,
효진
죄송합니다.
트레이너
나가
효진
죄송합니다. 잘하겠습니다.
트레이너
(무대로 뛰어 올라가) 아니 네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연기를 하겠다는 거니? 뭐? 양치기 하이에나? 지금 아동극 하니? 무슨 브레멘 음악대야? 대표님은 너같이 아무 생각 없는 아이를 도대체 왜 뽑았다는 거니? 내 생각에, 너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넌 한마디로 연기에는 재능이 없어. 자세도 안 돼 있고. 그냥 학교 잘 다니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데 취직해라. 너 공부도 잘한다며, 전교 일등이라며!
효진
아닙니다. 저는 연기를 하고 싶습니다. 대표님 앞에서 테스트도 받았어요.
트레이너
그러니까 내 말이. 그렇게 테스트를 받았으면 나한테도 뭔가를 보여 달라는 거야. 네가 열심히 하고 있고 또 잘하고 있고 그리고 능력이 있다는 뭔가를.
효진
잘 하겠습니다.
트레이너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그냥 네가 나 이거 할래요 그러면 모든 일이 다 알아서 술술 풀려나가는 줄 아는가 본데, 착각하지 마라. 인생은 피 터지게 싸워도 될까 말까야 이 바보야. 아이, 짜증나, (담배를 꺼내 문다.)
효진
저기, 여긴 금연인데요.
트레이너
요새는 화난다고 아무데서나 담배도 못 피우고, 아 속 터진다. 하여간 다시 해 봐. 그 무시무시한 음모에 부터
효진
무시무시한 음모에 끼어든 악령들이여, 어서 와서 날 나약한 여자로부터 벗어나게 해다오,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잔인한 마음으로 가득 채워다오!
트레이너
시원하지?
효진
예?
트레이너
그렇게 소리만 버럭버럭 질러대니까 시원할 것 아니야?
효진
죄송합니다.
트레이너
죽겠구만. 난 담배나 피러 갈란다. 너 더 가르치다가는 여기서 담배 피고, 벌금내야 할 것 같다. 아유 속 터져! (퇴장)
효진
(운다.) 나도 잘 할 수 있어. 나도 잘 할 수 있다고. 오리들에게 놀림 당하던 미운 오리새끼가 나중에 힘차게 날아오르는 백조가 된 것처럼 나도 잘할 수 있어. 잘 할 수 있어. 자, 오너라, 캄캄한 밤이여! 어서 와서 지척을 분간키 어려운 캄캄한 지옥의 연기로 장막을 드리우고, 나의 단도가 스스로 저지른 상처를 보지 못하도록 해다오. 그리하여 하늘도 그 검은 장막 속을 들여다보고 ‘안 돼! 그만두라니까!’하고 외치지 못하게 해다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래서, 잘못하니까 배우러 온 거잖아. 나는 연기를 하고 싶어. 연기를 하고 싶다고. (주저앉아 울먹인다) 아빠, 아빠…
2
목에 스카프를 두른 혜숙, 객석을 통해 등장, 한참 방황하다가
혜숙
자, 오너라, 캄캄한 밤이여! 어서 와서 지척을 분간키 어려운 캄캄한 지옥의 연기로 장막을 드리우고, 나의 단도가 스스로 저지른 상처를 보지 못하도록 해다오. 그리하여 하늘도 그 검은 장막 속을 들여다보고 ‘안 돼! 그만두라니까!’하고 외치지 못하게 해다오!
효진
누구세요?
혜숙
나? 히히히 나도 내가 누군지 몰라 기억에 없거든… 이 보이지 않는 실체들아. 너희는 내 살인의 가담자들이다. 이 풍만한 가슴팍으로 스며들어… 내 대사 어떠니?
효진
정말 잘 하시네요. 잔인한 인간의 양면성을 45도의 손짓과 양서류의 호흡법. 그렇죠 개구리의 배를 갈랐을 때 그 벌떡 벌떡거리는 심장의 충동으로 표현하다니! 저는 멕베드 부인이 살아서 돌아온 줄 알았어요. 선생님.
혜숙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뭐 개구리 심장?
효진
예. 그만큼 역할을 분석하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정말 세밀한 부분까지 너무도 완벽하게 표현하신다는 얘기죠.
혜숙
그러니? 개구리 심장이?
효진
그 비유가 별로 마음에 안 드세요? 그러면 그녀의 탐욕과 욕망을 이순신장군께서 명량대첩에서 적장과 대치했을 때의 그 긴장감처럼 표현하셨다면, 어때요?
혜숙
너 뭐 하는 아이니?
효진
저요? 연기하죠 물론.
혜숙
연기를 하려면 그렇게 꼭 뭔가 다른 것들하고 비교를 해야 하니? 뭐 개구리 심장에 이순신 장군에 또 뭐가 있었더라?
효진
양서류 호흡법.
혜숙
뭐라고?
효진
양서류는 피부로 호흡하잖아요. 그래서 마치 우리의 온몸에 돋아 있는 모든 감각기관이 하나로 뭉쳐
혜숙
아가
효진
예?
혜숙
넌 아직 이 여자의 욕심을 몰라. 왕을 죽이고 남편을 왕으로 삼으려는 거야. 그런데, 이 남편이 너무 착해. 악한 일을 해야 하는데 착하다면, 애초에 끝난 거지. 이 여자는 괜히 헛물만 켜는 거야. 너 어떻게 할래? 저 밖에 내 아이에게 욕을 하고 도망간 앞집 꼬마 놈이 있어. 그 놈을 혼내주고 싶어. 그런데 남편이란 작자는 “그냥 놔둬. 애들끼리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허허허.” 쓰레기 같은 놈. 뭐 애들끼리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나는 그럴 수 없어. 그런데 마침 그 꼬마 놈이 계단에 서 있는 거야. 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간다. 그 놈이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본다. 나는 그 아이 놈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복수의 미소를 띄고 그 놈을 그대로 밀어 버린다. 계단 아래로. 히히히. 네 남편이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해. 네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 악하지 못한 남자를 악하게 바꿔야 해. 협박이라도 해야지. 내 아이의 모멸감을 느낄 수 있도록 잠자고 있는 남편 깔고 앉아 그 아가리에 오줌이라도 싸 넣어야 해. (갑자기 목을 움켜잡고) 아 목이 아파, 답답해. 뭔가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다.. 저는 젖을 먹여 보았기 때문에 젖을 빠는 아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갓난아기가 내 얼굴을 보며 환하고 밝게 웃고 있을지라도 보드라운 잇몸에서 젖꼭지를 잡아 빼고 그 머리통을 박살낼 수도 있다고요. 나는 저 악독한 맥베드 부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아 목 아파. 왜 자꾸 이런 말들이 생각나는지 몰라. 그리고 제대로 생각나는 것도 아니고 자꾸 가물가물 해. 근데 우리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효진
그런데 선생님 좀 무서워요.
혜숙
무서워? 이건 연기야. 무서운 연기. 히히히. 하여간 어디 얘기하고 있었어?
효진
영혼…
혜숙
그래 영혼! (혼자 킥킥 웃는다. 그러더니 바뀌어서) 넌 영혼 없는 대사를 입으로만 나불대는 거라고 …맥베드 부인의 욕망, 탐욕을 생각해봐. 대사 속 그녀의 욕망을 들여다 봐. 그녀는 남편의 욕망을 부추기고 그가 악을 저지르도록 부추기는 잔인한 혀와 욕심을 가진 여자야.
효진
…네
혜숙
잔인한 인간의 양면성을 생각해봐.
효진
네 그래요. 저도 알아요. 그러니까 양서류가 폐로도 호흡하고 피부로도 호흡하는 그런 양면성을 느끼라는 거죠?
혜숙
느껴. 그냥 느끼라고. 이 여자, 자신의 젖을 물고 있는 자기 아이의 머리통도 박살 낼 수 있는 여자야. 자기 아이의 머리통도 박살낼 수 있는 여자! 뭐라고?
효진
자기 아이의 머리통도 박살낼 수 있는 여자!
혜숙
그래. 바로 그거야. 그녀의 탐욕을 느껴 보라고.
효진
(감정을 잡고 몰입한다) 그녀의 탐욕 욕망! 욕망! ……. 그러니까 서로 높은 서열을 차지하기 위해 힘을 겨루는 늑대의 욕망 같은…
혜숙
야!
효진
자, 오너라, 캄캄한 밤이여! 어서 와서 지척을 분간키 어려운 캄캄한 지옥의 연기로 장막을 드리우고, 나의 단도가 스스로 저지른 상처를 보지 못하도록 해다오. 그리하여 하늘도 그 검은 장막 속을 들여다보고 ‘안 돼! 그만두라니까!’하고 외치지 못하게 해다오! 어땠어요?
혜숙
그래 그래 좋아~ 잘했어. 조금 나아졌네.
효진
정말이요? 돌고래가 삼단고음 내는 것 같았어요?
혜숙
뭐? 돌고래? 그래 그래 돌고래다.
효진
저에게도 배우의 재능이 보여요?
혜숙
재능? 그래 보인다. 재능이 필요하지. 그렇지만, 재능으로 인정받으면 뭐하니? 재능만이 능사가 아니야. 다른 것도 많이 필요해. 아 또 목이 아프네. 이상하지 왜 나는 뭔가 생각이 나려면 목이 아플까? 답답해. 어쨌든 그래. 열심히 하면 잘 될 거야.
효진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그렇죠 제가 잘하고 있는 거죠.
혜숙
그래. 이제껏 내 예감은 빗나간 적이 없어. 그러니 맘껏 희망을 가지라고 (혼잣말) 아! 한번 있었구나! 그 지긋지긋하게 게으른 년, 머리에 똥만 찬 그 계집애는 실패했었어.
효진
그게 누군데요?
혜숙
알 가치도 없는 년이야 신경 꺼. 그건 그렇고 넌 왜 배우가 되고 싶은 거야?
효진
왜요? 그냥 우연하게, 정우성을 한 번 봤어요. 무대에서. 그 모습이 너무나 황홀해서 잊을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저도 배우가 되어서 그 사람과 함께 무대에 서면 좋겠다는 꿈을 꾸게 된 거죠. 그런데 지금은 그런 처음의 욕심은 사라지고 그냥 연기가 좋아요. 이게 내 인생의 목표가 된 거죠. 저는 공부 외에는 아무 것도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연기를 잘하고 싶어요. 욕심이 나요. 심심했던 내 삶에 저 망망대해를 떠도는 거대한 해적선을 향해 달려오는 10미터 높이의 요동치는 파도 같아요.
혜숙
그래. 네 삶의 목표. 배우!
효진
네. 내 삶의 목표 배우!
혜숙
너 이 길이 쉽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해. 변수도 많고.
효진
각오하고 있어요.
혜숙
그래 주로 각오하고 있다고 하지. 너 100 빼기 1이 얼만지 아니?
효진
99죠.
혜숙
99? 틀렸다.
효진
저 이래뵈도 전교 1등이에요.
혜숙
전교 1등이 이렇게 쉬운 문제도 몰라?
효진
그래요. 99.
혜숙
아니다. 100 빼기 1은 99가 아니다. 그건 0이다.
효진
에이.
혜숙
에이? 네가 아직 뭘 잘 모르는데, 자 네가 드라마에 캐스팅되는 것을 100으로 놓자
효진
예
혜숙
네가 캐스팅되면 몇이냐?
효진
백이요.
혜숙
그래. 그럼 캐스팅되지 않으면?
효진
그럼 … 빵이죠.
혜숙
이제 왜 100빼기 1이 99가 아니라 0인지 알겠어?
효진
하지만…
혜숙
그게 인생이야. 인생. 되느냐 안되느냐, 이기느냐 지느냐, 먹느냐 먹히느냐, 잡느냐 잡히느냐, 사느냐 죽느냐?
햄릿(남자) 칼을 뽑아 들고 등장한다.
햄릿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Whether it’s nobler in the mind /
to suffer the slings and arrows of outrageous fortune,
Or to take arms against a sea of troubles,
And by opposing end them?
효진
우와. (반했다) 기린처럼 긴 저 목. 학처럼 긴 저 다리. 울퉁불퉁 팔뚝에 튀어나온 저 강렬한 핏줄!!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의 고독이 느껴져요.
혜숙
지랄 … 내가 아는 그 계집애랑 똑같네. 내가 또 사람을 잘못 봤나?
효진
저 오빠가 바로 이 기획사 소속이었죠.
혜숙
아하, 그래서, 저 놈과 한 무대에 서고 싶어서. 참, 이유하고는. 요새 애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돼. 그래, 그래서 여기 와서 저 놈 만났어?
효진
아니오. 오자마자 군대 가더라고요.
햄릿 퇴장
 
 
3
쏘리 헤드폰 끼고 등장.
효진
언니 왔어요?
쏘리
…
효진
언니
쏘리
…
효진
(꽥) 언니
쏘리
응
효진
나 연습 하는 거 봤어요?
쏘리
응
효진
나 좋아지지 않았어요?
쏘리
응
효진
하여간, 언니 선생님 한 분 오셨어요.
쏘리
응
효진
앞으로도 절 봐주실 거에요.
쏘리
응
혜숙
잰 아직도 저러는구나.
쏘리
Yeah!!
효진
언니, 그냥 Yeah 가 아니라니까.
쏘리
응
효진
언니!
쏘리
응
효진
(혜숙에게) 언니는 매사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혜숙
나도 알아. 너무나 잘 알아.
쏘리
Yeah!
혜숙
에라 이 골 빈 계집애야 그래도 옛날의 네가 더 낫다. 그때는 생각은 없었어도 열정은 있었는데..
한쪽에 후배(남자) 등장.
후배
(대본을 보며 읽고 있다.) 야, 내가 너 사랑할 수 있잖아. 내가 너 사랑하면 안되냐? 너랑 나랑 사랑할 수도 있는 거잖아.
쏘리
야 너 지금 그걸 대사라고 하고 있냐? 그렇게 하면 안되지. 뭔가 가슴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충동이 실려 있어야 할 것 아니야. 대사는 그냥 말을 내뱉는 것이 아니다. 네 의지가 담겨 있어야 한다. 이거 모르니?
후배
죄송합니다.
쏘리
따라 해라. 대사는
후배
대사는
쏘리
그냥 말을 내뱉는 것이 아니다.
후배
그냥 말을 내뱉는 것이 아니다
쏘리
나의 의지가 담겨 있어야 한다.
후배
나의 의지가 담겨 있어야 한다.
쏘리
알겠지? 나의 의지를 가지고 말을 해야 한다고.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대본 이리 줘봐. ~ 나 봐라. (대본을 읽는다. 심각하게 못한다.) 야, 내가 너 사랑할 수 있잖아. 내가 너 사랑하면 안되냐? 너랑 나랑 사랑할 수도 있는 거잖아. 어때?
후배
예?
쏘리
뭔가 나의 강한 의지가 느껴지냐고?
후배
아직 제가 어려서
쏘리
그래. 넌 아직 좀 어리긴 하다.
후배
저 그럼 먼저… (가려고 한다.)
쏘리
어딜 가려고?
후배
예. 레슨이 있어서요.
쏘리
야 임마. 가르쳐 줬으면 직접 내 앞에서 배운 걸 해 봐야 하잖아. 해봐.
후배
제가 레슨이 급해서
쏘리
이 시끼가. 빨리 안 해?
후배
예. 하겠습니다. 야, 내가 너 사랑할 수 있잖아.
쏘리
야 그게 아니라니까. 임마. 의지, 의지가 보여야지.
후배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야, 내가 너 사랑할 수 있잖아.
쏘리
너 내 말 귀는 막고 코로 듣냐?
후배
네?
쏘리
야, 선배가 얘기를 하면 듣고 뭔가 바뀌어야 할 거 아니야.
후배
전 열심히 했는데요.
쏘리
네가 뭘 열심히 해? 하나도 변한 게 없는데
후배
아니에요. 정말 열심히 했단 말이에요.
쏘리
(손가락으로 머리를 밀며) 너 지금 나한테 대드는 거냐?
후배
예?
쏘리
네가 지금 큰 소리 내면서 눈 치켜 뜨고 나한테 대드는 거잖아. 임마.
후배
아니에요. 선배.
쏘리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지금 나한테 개기는 거지. 야 뻗쳐.
후배
예?
쏘리
뻗치라고 임마,
후배
저기 선배
쏘리
어쭈, 안 뻗쳐?
후배
아니 정말 여기가 무슨 군대도 아니고.
쏘리
뭐? 군대? 여긴 군대보다 더 한 곳이야 임마. 뻗쳐.
후배
에이 씨. 나 안 할래. 엄마. (퇴장)
쏘리
야, 이 시끼야. 너 이리 안 와? 야, (쫓아가면서) 야, 정우성! 정우성!
반대편에서 동료들(혜숙, 효진) 들어온다.
동료1(혜숙)
야 정우성 군대 간데
동료2(효진)
군대? 왜?
쏘리
그래? 어쩐지 그 놈 끈기가 없어 보이더라
동료1
너 때문에 가는 거야~ 몰랐어?
쏘리
왜? 걔 나 좋아했대?
동료들
(한숨을 쉬며) 하 . ..
쏘리
왜? 왜 고백 안 했대?
동료들
하
쏘리
하긴 고백했어도. 그 놈 내 스타일은 아니다.
동료들
하
동료1
야야야 우성이, 네가 괴롭혀서 군대 가는 거야. 알아?
쏘리
내가 괴롭혀서 군대 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선배로써 그 놈에게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보살폈는데. 그런 나의 마음을 그 놈이 착각했는가 보다. 지 마음을 내가 받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잊으려고 군대로 도망가는 거야.
동료들
하
현재
혜숙
얘가 뭐랄까 좀 생각이 없는 아이야. 더군다나 옛날에 의지가 하늘을 찌를 때, 사건 여러 개 일으켰지. 네가 아직도 이 연습실에 있다는 자체가 신기할 뿐이다. 하여간 지난 번 영화 찍을 때도 그래.
회상
동료1
우리 이번 영화 대박 나겠지?
쏘리
맞아 맞아 너무 좋다 우리 씨에프도 많이 들어오겠지?
동료2
우리 돈 많이 벌 거야. 내 기사 검색해 봐야겠다
쏘리
난 벌써 구글에 떴던 걸? 으하하하하하하
동료1
곧 다음 작품 섭외도 들어올 거야.
동료2
이번 작품에서 뜨면 이제 좀 튕기면서 가야지.
쏘리
나는 출연료를 왕창 올려서 비싸게 부를 거야.
다른 쪽에 감독(남자)과 다른 여배우(보희) 팔짱을 끼고 등장.
감독
허허허허허
여배우
네 감독님 ~ 그러니까요 호호호호 (잔뜩 애교를 부리고 있다)
동료1
야 쟤봐바 또 시작이야.
동료2
아 그러게 말이야 여우 같은 년 꼬리치는 것 봐라 쯧쯧
쏘리
어디어디 자세하게 말 좀 해봐. (급 흥분)
동료1
나 저 애랑 저번 작품 같이 했잖아~
모두들
(귀를 기울이며) 어어어어어
동료1
저렇게 감독님한테 눈웃음 치고 꼬리쳐서 내 대사 다 빼앗아 갔다니까.
동료2
진짜? 난 저런 애가 제일 싫어 연기도 못하면서
동료1
그치 그치?
쏘리
진짜 그랬어? 그렇단 말이지
동료1
쟤 유명해. 이제 곧 주연으로 발탁된다던데.
쏘리
안되지. 참을 수 없어.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서라도 내가 나서야겠다.
동료2
야, 참아. 그러다 너 감독 눈 밖에 나면 어쩌려고 그래?
쏘리
아니야.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어 정의를 향한 나의 이 양심. 야 기다려봐. 내가 잘 해결할 테니까. (감독과 여배우에게 다가간다) 감독님 죄송합니다 이 친구랑 이야기 좀 할게요. 야 이야기 좀 하자.
여배우
네?? 
쏘리
이야기 좀 하자고 ~~ 말이 안 들려? (다른 쪽으로 끌고 가며) 야 이 강도 같은 년아. 왜 남의 대사를 빼앗아가는데 어? 얼굴도 못 생긴 게 !! 연기도 못하는 년이 !! 콱
여배우
왜 이러세요 ·~ (약한 척)
쏘리
또또 사람들 본다고 연기 하는 거 봐라. 너 오늘 죽어봐야 돼. 다음부터는 잘 생각하고 행동해. 내가 널 지켜보고 있다가 또 그런 짓 하면 바로 응징할 거야. 그래야 우리나라가 정의사회가 되는 거야. 이 나쁜 년아.
모두 덤벼들어 뜯어 말리고 그 틈에 여배우와 감독은 도망친다.
혜숙
봐라. 저 사건 뒤로 너 작품 하나도 안 들어왔잖아.
쏘리
아니 왜 우리사회는 정의로우면 피해를 보는 거지?
혜숙
정의? 네 입에서 정의라는 말이 나오니? 너 경찰서에서도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지?
경찰(남자) 들어온다.
경찰
쏘리씨 폭행이에요. 기억하시죠? 증인도 충분히 있고요.
쏘리
(고개 숙이고) 그게 아니라…(고개를 든다) 헉 (반했다.)
경찰
자, 묻는 말에 정확하게 대답하세요.
쏘리
(앉아서 경찰 뚫어지게 쳐다본다)
경찰
이름, 쏘리 킴 맞나요?
쏘리
Yes, It’s just my name. What’s yours?
경찰
주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쏘리
and you 청담동?
경찰
이것 보세요. 지금
쏘리
네. 보고 있어요. I wanna be seeing you.
경찰
저를 보지 마시고
쏘리
그럼 어딜 볼까요? 당신으로부터 빛이 나오는데 그걸 보지 않는다면
경찰
여보세요.
쏘리
네. 보고 있다니까요.
경찰
저기. 쏘리킴씨. 지금 사람을 패서 경찰서에 잡혀 온 거에요. 아시겠어요? 아직 상황 파악이 정확하게 안 되시는 것 같은데.
쏘리
그게 뭐 중요해요? (폰을 내밀며) 자 여기 내 번호, 찍으세요.
경찰
엄마 (소리지르며 도망)
현재
혜숙
생각 좀 하고 살아. 계집애야. 언제까지 그렇게 생각 없이 살래? 넌 도대체 왜 사는 거니?
쏘리
당연히 연기를 하기 위해서 살지. 조금만 기다리면 곧 내 시대가 올 거야. 언니도 기대해!
혜숙
그렇게 해서 잘도 성공하겠다. 네가 얼굴 좀 예쁘고 키 좀 크다고 세상에 뵈는 게 없니?
쏘리
언니는 나를 몰라. 나는 다른 애들과 차원이 달라. 나의 뛰어난 연기력, 깊이 있는 지성, 그리고 카리스마 넘치는 시선.
혜숙
너하고 얘길 시작한 내가 잘못이다. 그래 너 훌륭하다.
쏘리
그걸 이제야 알았어? 그나저나 그때 그 경찰 진짜 내 스타일이었는데 그대여. 어디에 있나요? 나를 잊지 말아요.
효진
돌고래가 아가미로 숨 쉬는 것 같은 어이없는 상황이네요
쏘리
Oh, Where are you, my darling??
혜숙
제발 인생을 그렇게 쉽게 살지 마.
쏘리
어렵게 살 것도 없어. 어차피 한 번 살고 죽는 거니까. 나는 인상 쓰지 않고 웃으며 살다가 죽을 거야. 인상 쓰고 궁상 떨면서 산다고 안 되는 일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웃으면서 사는 게 더 낫지. 웃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던데.
효진
(웃으며) 언니, 웃다 죽은 귀신 아니고 잘 먹고 죽은 귀신,
쏘리
응? 그래. 잘 먹으면 웃음도 잘 나오는 거야. 허허허허
혜숙
그래. 너 잘 났다.
4
보희 기타 메고 등장
보희
실례합니다.
모두 쳐다본다.
보희
저기, 대표님이 여기에서 기다리라고 하셔서.
효진
언니 연기하러 왔어요? 내 후배네. 언니 알죠? 여기는 기수가 중요해요. 언니는 내 후배니까 내 말 잘 들어야 해요.
보희
응? 그렇게 해야 해?
효진
그럼요. 그런데 기타를 메고 있는 걸 보니, 노래할 건가요?
보희
응.
효진
그래요? 언니 노래 잘하는가 봐요.
보희
아니, 꼭 그렇진 않지만. 그러니까 연습생으로 들어오려는 거지. 잘하면 벌써 뭘 하고 있겠지.
효진
아니에요. 요샌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순서를 기다려야 한대요.
혜숙
(어느 새 옆에 와 있다.) 노래를 하려고?
보희
예. 안녕하세요?
혜숙
노래? 노래 좋지. 내가 말이야 옛날에 정말 토탈 엔터테이너가 되려고 노래까지 다 배웠단 말이야. 내 노래 하나 들어볼래?
노래 한 곡 멋지게 부른다.
혜숙
자 이제 네 차례다. 네 노래 한 번 들어보자. 당연히 나보다 잘해야 한다. 잘 못하면 국물도 없는 줄 알아라.
효진
그래요. 우리 한 번 들어봐요.
보희
잘 못하는데.
쏘리
한 번 해봐요. 근데 몇 살? 나랑 비슷해 보이는데.
보희
일곱이요.
쏘리
일곱? 우리 동갑이네. 그런데 뭐하다 이제 왔어? 여기서 우리 나이는 거의 퇴물이야.
보희
정말이요?
쏘리
하지만, 잘 하면 되지. 일단 노래부터 한번 들어볼까? 부족한 부분은 내가 가르쳐 줄게. 여기 잘 나가는 애들 다 내가 가르쳤거든. 군대 간 정우성이도
트레이너(남자) 등장.
트레이너
보희씨 대표님이 테스트 좀 해 보라던데. 곡도 쓴다며? 어디 일단 직접 쓴 곡으로 하나 들어볼까?
보희
예.
노래 한 곡 부른다.
트레이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보희
예?
트레이너
지금 그 노래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고?
보희
아니 저는 그냥
트레이너
그래 그냥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고?
보희
그냥 제 느낌이..
트레이너
느낌이?
보희
그냥
트레이너
그 노래를 듣고 관객이 뭘 느끼길 바래? 또는 어떤 인상을 전달하고 싶은 거야?
보희
그런 거는 아직 생각을 안 해봤는데요.
트레이너
희망이 뭐야?
보희
예?
트레이너
희망이 뭐냐고
보희
그거야 가수죠
트레이너
그냥 노래만 부르는 가수?
보희
: …
트레이너
그럼 보희씨는 로봇인가?
보희
…
트레이너
생명이 있어야지 목적이 있어야지 노래를 통해 도달하고 싶은 어떤 목표가 있어야지. 보희씨 노래 속에 어떻게 삶을 녹여 넣을까? 그리고 그 노래를 듣는 관객들이 어떻게 내 생각을 공유할 수 있을까? 이런 근본적인 것에 대한 철학이 없다면 그건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지. 그냥 기계가 되고 마는 거지. 알겠어? 예술가로서의 자존심, 그게 필요하지.
보희
예. 알겠습니다.
트레이너
그 부분부터 생각해 봐요.
트레이너 퇴장
혜숙
자식, 되게 깐깐하게 구네
보희
아니 저 얘기가 맞는 거 같아요. 사실 저는 저런 얘기는 아직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거든요. 그냥 열심히 잘 하면 된다고만 생각했어요.
효진
트레이너 오빠가 가끔 괜찮은 얘기 많이 해요. 비싸서 먹기 힘든 웅담 같은 명언!
쏘리
웅담 같은 명언! 그래 쓴 거는 똑같다. 히히히히
무대 뒤 조명 들어오며 보희 아빠(남자) 등장.
아빠
보희야. 네 노래를 들었다. 잘 하는 구나. 잠들어 있던 이 아빠의 영혼을 깨울 만큼. 이제 곧 가수가 되겠구나. 네가 노래로 세상을 비추는 별이 되기를 아빠는 진심으로 바란다. 아무런 걱정 말고 열심히 노력해라. 잘 된다는 희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라. 아빠가 항상 네 곁에 있어 줄게. 사랑한다. 아가.
보희
아빠. 아빠.
효진
언니. 언니 왜 그래요? 아빠가 보여요?
보희
아빠가 내 노래를 들었어. 항상 내 곁에 있겠다고 하셨어.
효진
언니.
보희
아빠. 제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행복한 기억이죠. 아빠와 함께 노래 부르던 것. 아빠. 보고 싶어요.
효진
나도 우리 아빠 생각 나. 아빠. 아빠. 우리 아빤 제가 연기하겠다고 올라올 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전 아빠가 무관심한 거라 생각했는데 … 나중에 알게 됐어요 아빠의 마음을. 인생의 큰 꿈을 꾸는 딸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던 그런 아빠의 맘이… 가슴이… 얼마나 미어졌을까요?
무대 뒤에 효진 아빠(남자) 나타나 시 낭송.
날마다 혹시나 하는 기다림을 
포도송이처럼 무겁게 달고
어둠 속을 걷는 사람에겐
하루도 견디기 힘들 거야
놀아도 서울에서 놀래요 하더니
기획사 높은 담 기웃거려 봐야 
키가 작아 볼 수도 없지
작은 키는 무엇으로 키워주랴
소리만 요란한 빈 트럭인 듯 
아빠는 재주가 없단다 
지금쯤은 어둠에 푹 젖었을 터 
어두울 수록 빛은 밝으리니
비굴하게 살진 말아라 
아빠 퇴장하고, 효진 아빠를 부르며 운다.
쏘리
야, 이거 갑자기 왜 이러니? 나도 아빠 있어. 나도 아빠 사랑해. 안돼. 난 웃고 살기로 했단 말이야. 허허허허. 우리 다른 얘기 하자. 다른 얘기. (보희에게) 너는 이제부터 내가 책임지고 교육시킬 테니까 나만 잘 따라와.
보희
정말? 그런데 난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데. .
쏘리
걱정할 것 없어.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혜숙
얘. 넌 자꾸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라. 네가 누굴 어떻게 키우겠다는 거야?
쏘리
어머. 언니 왜 이래? 이래봬도 나 정우성 연기 지도한 여자야
혜숙
그래서 군대 보냈지
효진
어? 언니가 우성이 오빠 군대 보낸 거예요?
쏘리
몰라 난 잘 모르는데.. 걔가 나 좋아했다는 것만 알아
혜숙
그래 저 애야 정우성 군대 보낸 애 ..
효진
Oh my god. She’s driving me crazy! Fuck you!!! You stupid cow!!!
쏘리
So, what?
둘이 한쪽에서 싸우는 사이 이를 보고 혜숙 보희 웃다가
보희
(혜숙에게) 근데 언니는 누구세요?
혜숙
나? 나는 배우지.
효진
그래요.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다 알겠는데 선생님만 모르겠어요. 선생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그 깊이 있는 대사가 정말 소름 끼치도록 멋진 배우. 성함이?
장면이 진전되어 간다.
혜숙
이름? 내 이름. 내 이름이 생각 안나. 아 나는 레이디 맥베드. 전신의 피를 혼탁하게 하여 연민의 정이 얼씬도 못 하게 하고 양심의 가책이 나의 흉악한 결심을 뒤흔들거나, 혹은 그 가책으로 인해 실행을 단념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다오. 그래. 맥베드 정신 똑바로 차려라. 네 놈이 좀 더 악하게 되어 덩컨 왕의 그 기름진 배때기에 너의 단도를 깊게 쑤셔 넣어야지. 그리고 그 칼로 그 놈의 목을 따고 그 흐르는 뜨거운 피로 네 온몸을 씻어야지. 그 피로 너는 왕이 될 테니까. 네 머리에는 그 놈의 피가 묻은 왕관이 올라갈 테니까. 여보, 이것 밖에 다른 방법은 없어. 이리 와요. 내 가슴에 당신의 머리를 박아요. 내 젖을 빨아요. 아~~ 당신에게 힘을 줄 거에요. 그 놈의 배때기에 칼을 꽂아 넣을 힘을.
효진
무서워요.
쏘리
언니. 무슨 그런 끔찍한 얘기를 해?
보희
그래요. 그만 하세요.
혜숙
(미친다.) 아니야. 아니야. 나는 폭발하고 싶어. 뭔가 모를 뜨거운 것이 내 속에 있어. 그것이 내 얼굴의 모든 구멍을 뚫고 솟아나올 준비를 하고 있어. 내 눈깔들이 튕겨 나가고 내 콧구멍이 터져 나가겠지. 내 두 귀에서 뜨거운 뭔가가 흘러나온다. 나의 뇌. 물처럼 변해버린 내 뇌가 내 귀를 통해 빠져 나오고 있어. 뜨겁다. 뜨겁다. 온몸이 뜨겁다. 나는 아무 것도 느끼고 싶지 않다. 싫다. 이 세상이 싫다. 너무 싫다.
쏘리
(한발 나서며) 저기, 언니?
보희
뭔가 옛날 생각이 나요?
혜숙
그래. 옛날 생각이 난다. 하나씩 떠오른다. 그런데 모르겠어. 내가 누군지. 뭔가 내 속에서 내가 누구라고 알려주는 것 같은데, 그런데 모르겠어.
효진
저기 우선 이름만 기억해 보세요. 그래서 구글에 물어보면 금방 알려줄 테니까.
쏘리
그래. 그렇지 않아도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왜 언니는 나만 보면 자꾸 트집을 잡으면서 시비를 거는 거야? 언니는 누구야?
혜숙
(갑자기 또 돌변해서) 넌 너무 예쁘게 생겼어.
쏘리
언니 사람 볼 줄 아네.
혜숙
넌 너무 예뻐. 예뻐. 예뻐.
쏘리
아니, 왜 왜 이래? 언니.
혜숙
넌 너무 예쁘다고.. 난 사람들이 싫어. 이유는 몰라. 하지만 사람들이 싫어. 모두 싫어. 모두 날 쳐다보는 것 같아. 싫어. 싫어. 저리 가. 저리 가라고.
효진
저 선생님. 선생님.
혜숙
응? 응?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했지? 넌 누구니?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난 가끔씩 내가 어디에 있는지 헛갈릴 때가 있어. 그런데 자세히 보면 사실 나는 항상 이 연습실에 있지. 그런데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쏘리
내가 예쁘다고!
효진
맞아요. 저 언니 예쁘다고 했어요.
혜숙
그래 예쁘지. 넌 참 예뻐. 그런데 골이 비어서 탈이지. 생각이 없어서 탈이지. 이 바보 같은 년. 예쁘고 키 크면 뭐해? 생각이 없는데. 게으른데. 자꾸 성공하려는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걷어차고 있는데. 그래 생각이 나. 어렴풋하게 떠올라. 나의 지난 날이. 난 배우였어.
로미오(남자) 등장.
줄리엣
로미오. 로미오. 왜 당신은 로미오에요. 몬태규 로미오. 아버지와 이름을 버려. 그것이 싫으면 날 사랑한다고 맹세라도 해. 그럼 내가 이곳을 버릴게. 몬태규 로미오. 당신 이름만이 나의 원수잖아. 로미오 로미오. 그것들만이 날 그와 갈라놓네. 그건 손, 발, 얼굴 아무것도 아니잖아. 로미오란 이름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당신이야. 그 이름을 버리고 날 가져. 오 로미오.
로미오
그대를 갖겠소.
줄리엣
어떻게 왔어. 들키면 죽어.
로미오
진흙 같은 밤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염려 말아요.
줄리엣
내 말 엿들었죠? 경박한 애라고 생각해? 나 사랑해요? 로미오. 내가 너무 쉽게 걸려들었어. 솔직히 말해줘. 까탈부리고, 찡그리고, 심통 낼까? 그래도 나 사랑하지? 그럼 빨리 대답해봐.
로미오
저 청순한 달을 걸고 맹세해.
줄리엣
저 변덕쟁이 달은 싫어. 달을 건 맹세는 하지 마. 저 달은 한 달 내내 그 모습을 바꾸잖아. 난 당신 사랑이 그렇게 될까 무섭고 두려워요. 당신을 걸어요. 난 당신을 믿으니까.
로미오
사랑해요.
줄리엣
너무나 갑작스러워 당황되네. 나만의 사랑인줄 알았는데 … 마치 번갯불 같아.
로미오
내 맹세를 주었으니 당신의 맹세를 받고 싶소.
줄리엣
당신이 말하기 전에 이미 내 마음을 다 주었는걸. 또 주고 싶고, 되돌려 받고 싶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내가 탐내고 있어. 저기, 내 사랑은 바다 같은가 봐요. 그래서 퍼내면 더 많아져요.
쏘리
줄리엣! 줄리엣!
로미오 퇴장.
효진
멋지다. 절대 깨지지 않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의 맹세.
혜숙 갑자기 어슬렁거린다. 마치 하이에나가 양 주위를 돌 듯
혜숙
나도 한 때 잘 나갈 때가 있었어. 이 세상이 모두 내 것만 같았지. 나는 주인공이고 싶었어. 모두의 주목을 받는 최고의 스타가 되고 싶었어.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환호할 것이고 내가 가는 곳마다 나를 보기 위해 몰려 들 거야. 그때 그를 만났어. 내 삶에 새로운 의미를 준 그 사람.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어. 평범한 직장인. 착한 사람. 우리는 서로 사랑했고 곧 결혼했지. 그리고 아이도 생겼어. 그리고 나는 점점 더 주가가 오르고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아, 목이 아파. (소리 지른다.) 아 목이 아파.
효진
(다가오지는 못하고 한 쪽 귀퉁이에서) 선생님. 왜 그래요? 목이 아파요?
쏘리
언니. 언니. 그러지 마. 무섭잖아.
혜숙
아, 목이야. 목이 아프다고. 칼 가져와. 이 목을 잘라야겠어. 너무 목이 아파. 이 목이 없으면 아프지 않겠지. 칼 가져와. 칼 (뛰어 다니며 칼을 찾는다.) 내 이 아픈 목을 칼로 뎅겅 잘라 내면 어떨까? 내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겠지. 얼마나 높이 올라갈까? 저 천장까지 올라갈까? 내 뜨거운 피, 시뻘겋게 이 무대를 가득 채울 거야. 그래 내 피로 이 무대를 덮어 버리는 거야. 내 피로 이 세상을 덮어 버리는 거야. 목 잘린 내 몸에서 피가 흘러 넘쳐 이 세상을 덮을 거야. 꼴 보기 싫어. 모두 보기 싫어. 모두 보기 싫어. 칼! 칼! 칼 가져와. 내 목을 자를 거야.
보희
911 부를까요? 지금 불러야 하는 상황 아니에요?
혜숙
그때 내가 한참 열심히 하고 있을 때, 나에게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고 또 내가 사랑하던 일이 있던 그 때, 그 때, 그 일이 터진 거야.
효진
일이요? 무슨 일이요?
혜숙
어느 날. 난 술을 마셨어. 감독과 제작자와 함께.
제작자(남자)가 객석으로 나온다.
제작자
(관객에게) 김감독. 그 동안 내가 돈도 많이 댔잖아. 자네가 만들던 영화 중에 별로 장사가 안되는 영화도 내가 손해 다 안고 갔는데. 그 괜찮은 아니 하나 소개해 준다더니. 어딨어? (혜숙을 가리키며) 아, 저 아이야? 자네가 내 취향을 제대로 아는 구만. 시퍼렇게 뭘 모르는 애들보다는 저렇게 뭘 좀 아는 애들이 즐기기에 좋지. 나이도 적당히 있고. 고마워. (무대로 올라와서) 자 가자. 오늘은 내가 널 여왕으로 만들어 주마.
혜숙
저기, 제작자님. 저기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요. 저는 가정이 있는 사람이에요.
제작자
그래? 가정? 그거 좋지. 짜릿하지 않아? 응? 밤에는 집에서 남편과 그리고 낮에는 이렇게 나와 즐기면 되니까. 내가 널 책임지고 키워주지. 감독도 다 알아.
혜숙
저기 제작자님. 그게. 저는 그러니까 자꾸 이러시면 안됩니다.
제작자
야, 이거 아주 새로운데. 그래 그렇게 적당히 빼고 그래야 훨씬 맛이 나지.
혜숙
저 제작자님.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제작자
뭐라고?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혜숙
집에서 가족이 기다려서요. 그럼.
제작자
야, 너 이리 안 와. 너 감독도 다 알고 있어. 네 소속사 대표도 알고. 그냥 나하고 가볍게 즐기면 되는 거야. 아무도 이 일은 얘기하지 않으니까 너와 나만의 비밀로 남는 거지.
혜숙
저, 제작자님. 저는 아무래도.
제작자
너 정말 이럴 거야. 이러면 좋지 않다.
혜숙
죄송해요.
제작자
에이 씨. 그래 네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가 본데, 어디 두고 보자. 네가 얼마나 잘 나갈지.
제작자 퇴장.
혜숙
그 놈에게 지옥에라도 가라고 욕이라도 해 줄걸. 개새끼들. 개새끼들. 지옥에나 가 버려. (주저 앉는다.) 갑자기 무명 시절 내가 찍었던 싸구려 에로 비디오들이 나타나 뿌려지기 시작했어. 사람들이 나를 비난했어. 싸구려 배우가 고고한 척 했다고. 인터넷에서도 난리가 났고 나는 하루 아침에 싸구려 배우로 전락했지. 참다 못한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갔고 나는 외톨이가 되었지. 나는 외출도 할 수 없었어. 모두가 날 쳐다보는 것 같아서, 그들이 내 발가벗은 몸을 유심히 훑어보고 있는 것 같아서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어. 내 꿈은 산산이 부서졌어. 나는 신을 원망했지. 신이시여. 신이시여! 개새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더군. 내가 내가 뭘 잘못했어. 왜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망가져야 해? 신이시여 신이시여. 왜? 왜? 왜 내 인생에 이런 고통을 주시나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난 열심히 살았어요. (운다.)
효진
선생님.
쏘리
언니. 미안해요.
보희
언니, 들어봐요. 언니의 마음을 대변하는 노래에요. 제목은 ‘어떤 여배우의 노래-엿 같은 세상’
더러운 세상 엿 같은 세상 니들 맘대로 하는 세상
개입하지 마 쳐다보지 마 내 삶에 발 담그지 마
꺼져 사라져 꼴 보기 싫어 이 쓰레기들아
엿 같은 놈들 욕심만 있는 놈들 지들 배때기만 채우는 놈들
니들이 뭐냐 니들이 뭘 하냐 이 개 같은 놈들아 이 쓰레기들아
신? 개똥 같은 신? 엿먹어 능력도 없는 신이시여 엿이나 드셔
당신은 뭘 보고 있어 저 쓰레기 같은 놈들이 설치는데 왜 보고만 있어
착한 사람은 병신 되고 선한 사람은 바보 되고
욕심 없는 사람은 거지 되고 평화를 원하는 사람 바보 멍청이
힘 있는 놈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그들만의 가치로 세상을 지배해
무릎 꿇으면 용서를 꿇지 않으면 죽음을
더러운 세상 엿 같은 세상 니들 맘대로 되는 세상
개입하지 마 쳐다보지 마 내 삶에 발 담그지 마
엿 같은 세상
노래 끝.
효진
야, 그거 노래 좋다. 언니. 그거 발표하면 대박이겠다.
보희
그렇지. 내 혼이 들어간 노래야.
쏘리
그래 좋다. 내가 받아 주지. 나하고 듀엣으로 가자.
둘이 화음 넣어서 멋지게 부르고 난 후
쏘리
야, 시원하다. 속이 다 뚫리는 것 같은데, 역시 우리는 환상의 듀엣이야. (객석을 보고) 어이 후배님들. 우리 다 같이 한 번 불러볼까? 자 우리가 먼저하고 후배님들 같이 한 번 하고.
쏘리와 보희가 같이 다시 한 번 부르고 관객과 함께 한 번 부르고,
효진
(혜숙에게) 그런데 선생님, 그게 언제 얘기에요?
혜숙
언제?
효진
그 사건. 인터넷에서도 난리였었다면서요? 그래서 선생님 이름이 뭔데요?
혜숙
박혜숙.
쏘리
박혜숙? 그 이름 들어본 것 같은데. 꽤 된 얘긴데.
보희
그래 그거 한 때 꽤 유명한 사건이었는데.
효진
그럼 선생님이 그 박혜숙.
쏘리
아니지. 박혜숙 배우는 자살했는데.
보희
맞아. 기획사 연습실에서 목 매달아 죽었다고 나와 있는데.
혜숙
죽다니? 내가? 무슨 얘기야? 난 여기 이렇게 있는데. 내가 죽었다고? 인터넷에 그렇게 써 있어? 이놈들이 날 욕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 죽었다고 헛소문까지 퍼뜨리네. (스카프를 풀며) 내가 무슨 목을 매? 봐. 보라구. 내 목이 어때서? 내 목이 어때서? 그런데 이게 뭐야? 이 목의 상처.
쏘리
그럼 언니는 뭐야? 언니는…
5
모두 으악. 한 쪽으로 도망. 혹은 객석으로 도망. 이후부터 혜숙의 공포씬
혜숙
내가 죽었다고? 내가? 아니야. 난 여기 이렇게 있잖아. 너희들이 나를 볼 수 있잖아. 너희들 귀신이 보이는 것 봤어? 너희는 모두 나를 볼 수 있고 나하고 얘기도 했잖아. 지금까지. 자 나를 만져봐. 나를 만져보라고. 따뜻하지? (이건 관객에게 할 수도 있다.) 너 봤어? 귀신이 따뜻한 것 봤어? 귀신은 차가운 거야. 온 몸의 피가 빠져 나가 식어 비틀어졌기 때문에 차가운 거야. 피부색도 퍼렇고 온통 뻣뻣하지. 그런데, 나를 봐. 내가 뻣뻣해? 내가 차가워? 난 죽지 않았어. 아니 죽을 수 없어. 내 삶이 있는데 내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있는데 내 인생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죽을 수가 있어? 나는 죽지 않았어. 죽지 않았다고.
쏘리
저기요. 언니. 미안해요. 우리 아무 소리 안 할 테니까 그냥 조용히 가세요. 제발이요. 엉엉
혜숙
가라고? 어디로? 나에게 어디로 가라고? 내가 어떻게 갈 수 있어? 내가 뭘 잘못 했어? 아니야. 이건 불공평해. 이럴 수는 없어. 왜? 왜? 왜 내가 죽어야 해? 내가 무슨 죽을죄를 졌는데? 난 이렇게 갈 수 없어. 나는 그 놈들을 잡아서 내 동료로 만들 거야. 이놈들 어디에 있어? (마치 실성한 듯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온통 무대와 객석을 헤집고 다닌다. 가능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이놈들 어딨어? 나와. 나와 함께 가자. 가기 전에 할 일이 있어. 모가지 앞으로 내밀어. 난 그놈들 목을 잘라 목에서 솟구치는 시뻘건 뜨거운 피를 마실 거야. 그리고 덜렁 잘린 그놈들 대가리에 불을 붙여 횃불로 삼을 거고, 그놈들 몸뚱이를 마차 삼아 타고 갈 거야. 히히히히. 안 돼. 난 이렇게 갈 수 없어. 돌려줘. 내 아이, 내 남편. 그들 모두 돌려줘. 나는 아무 것도 잘못한 게 없어. 난 죄가 없어. 아 목이 아파. 또 목이 아파. 칼을 줘. 칼. 내 목을 잘라야 해. 아프지 않게 내 목을 잘라야 해. 내 얼굴이 부끄러워. 내 얼굴을 가려야 해. (한 동안 상황이 진행된 후) 나는 그 놈들 목을 자를 때까지 여기를 떠날 수 없다. 그리고 너희들도 너희들 목표가 완수될 때까지 여길 떠날 수 없다. 알았어?
모두
예.
혜숙
(객석을 향해) 너희는 왜 대답이 없어? 알았어?
객석
예.
혜숙
잊지 마라. 한 번 설정한 목표는 반드시 이루어야 해. 하나라도 부족하면 그건 이루지 못한 거지. 즉 너희가 사는 세상은 100빼기 1이 99가 아닌 0이되는 세계란 말이다.
쏘리
(앞으로 불쑥 나서며) 에이 진짜. 내가 귀신이라고 조금 무서운 척 해 줬더니 점점 더 가관이네. 그런 게 어디 있어? 100빼기 1이 99지 그게 어떻게 0이야.
혜숙
에이 계집애. 야 좀 끝까지 가자. 끝까지. 일찍 죽은 선배 귀신에 대한 예우차원에서라도.
쏘리
아이구, 무시라.
효진
그런데 오늘은 진짜 무서워 보였어요. 멋있어요.
혜숙
봐라. 얘 얘기하는 거. 애가 얼마나 경우가 바르니. 그래서 네가 욕을 먹는 거야.
쏘리
언니. 이제 그 말도 안 되는 얘기 그만해. 100빼기 1은 0이 아니라 99야. 99. 온 세상 천지에 다 물어봐. 누가 0이라고 대답하나? (관객에게) 얼마에요?
관객의 대답에 따라 배우들이 그 대답에 끼어들어 약간의 논쟁을 벌인다.
효진
맞아요. 세상에 절대 최고는 없죠.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100과 0으로 딱 갈리겠지만, 그런데 선생님 논리를 반박하자면, 그래. 내가 원하는 역할에 캐스팅되면 100이고 안되면 0이 맞겠죠. 하지만 만일 다른 역할에 캐스팅 된다면 그것도 0인가요? 그건 0은 아닐 것 같은데. 원래 희망했던 역할과 비교해 보면 그래도 한 몇 십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선생님 논리는 너무 이분법적 흑백논리가 과한 것 같아요.
쏘리
그래. 역시 너 전교 1등답다. 그렇지 지금 이 순간 목표를 향해서 가고 있는데, 언니 얘기에 따르면 가는 건 없고 아니면 중요하지 않고, 결과가 100이나 0이라는 거잖아.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언니 얘기도 맞다. 그렇지 결과가 중요하잖아. 복권 긁어서 안되면 꽝이잖아.
효진
언니는 도대체 어느 편인 거야? 언니가 그래서 공부를 못하는 거야. 의견이 확실해야지 이럴 때는 이런 것 같고 저럴 때는 저런 것 같으면 도대체 어떤 게 맞는다는 말이야.
혜숙
아니다. 이제야 말로 저것이 제 정신으로 돌아오는가 보다. 다행이네. 죽어서라도 정신을 차렸으니.
효진
그럼 결과는 누가 평가해요? 100이다 0이다의 결과는?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드라마 오디션에서 떨어졌어요. 그럼 분명 그 오디션의 결과는 0이죠. 그러면 끝인가요? 그 다음의 내 인생은 없나요?
쏘리
그렇지. 그러니까 길게 놓고 보면 다음도 있고 그 다음도 있는데 결국 마지막까지 가 봐야 결과가 0인지 아니면 100인지 알 수 있다는 거네. (보희에게) 야, 네 생각은 어떠니?
보희
예?
쏘리
네 생각은 어떠냐고?
보희
저요? 그런데요.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혹시 세 분 다 귀신이세요?
혜숙
그럼 넌 아니니?
보희
아빠… 아니에요. 저는 사람이에요.
효진
언니가 사람인지 귀신인지 어떻게 알아요?
보희
저 가까이 오지 마시고요. 무서워요.
효진
우리도 무서워요.
보희
제발요. 제발 가까이 오지 마세요.
쏘리
뭐가 무섭다고 그래. 조금 전까지 함께 떠들고 노래하고 신나게 놀아놓고는. 모를 때는 괜찮고 알고 나니까 무섭다는 거야?
보희
무서워요. 아빠.
철수(남자)
(등장하며) 그래. 아빠 여기 왔다.
보희
으악. 이제 남자 귀신까지.
철수
얘 귀신 아닌가?
쏘리
아닌가 본데. 어쨌든 살았든 죽었든 중요하지 않고, 네 대답을 들어보자.
보희
무슨 대답이요?
혜숙
아까 우리가 한 얘기. 100빼기 1이 99냐 0이냐?
보희
글쎄요. 각자 얘기하신 게 다 옳은 것 같은데.
쏘리
확! 너도 귀신 되고 싶니? 하나 골라봐.
보희
아니, 그러니까 분명 뭘 하려다 안되면 0이 되는 건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아까 저 귀신 분 얘기처럼 결국 끝까지 가봐야 알게 되잖아요. 그래서 끝까지 가보지 않고 도중에 죽으면 결국 100빼기 1은 무조건 0이 될 수밖에 없는 거고 또 끝까지 가서 성공하면 100이고 실패하면 0이 되는데. 그러니까 순간 순간은 100도 될 수 있고 0도 될 수 있지만 결국 인간은 모두 죽으니까 자기 인생이 100이었는지 아니면 0이었는지는 죽는 순간이 돼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효진
언니도 전교 일등?
혜숙
무슨 얘길 그렇게 복잡하게 하니? 어떤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면 100, 안되면 0. 간단하잖아.
보희
그럼 하나의 사건으로 0이 되면 무조건 0인가요?
혜숙
그럼. 0이지.
보희
그럼 0이 되면,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음 또 다른 100을 향해 가야 하나요? 아니면 그냥 죽어야 하나요?
혜숙
뭐라고? (화를 낸다.)
보희
아빠!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철수
너 말 잘한다. 맞아. 일단 하나를 해서 잘 안되면 0이지.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돼? 그냥 죽나? 아니면 다시 다른 100을 향해 출발해야 하나?
보희
저는 다시 출발할래요. 또 다른 100을 향해.
효진
저도 다시 출발할래요.
쏘리
넌 다시 못해. (잠깐 멈추었다가) 죽었으니까.
일순간 정적.
쏘리
(웃으며) 우리는 죽어서 더 이상 100도 99도 1도 0도 다 의미가 없어. 이제는 더 이상 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우리는 여기에서 나갈 수도 없고 그냥 영원히 여기에 이렇게 갇혀 있어야 해. 나는 웃을 거야. 난 울지 않기로 했어. 옛날에 처음 내가 연기한다고 할 때 아빠가 말렸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너는 끈기도 없어서 뎌욱 어려울 테니까 평범한 일을 하지 그러니? 그러면서 얘기했지. 너, 세상이란, 특히 그 세계는, 100빼기 1이 99가 아니라 0이 되는 곳이야. 하나 잘못하면 그냥 완전히 끝나는 거야. 난 아빠의 그 말뜻을 몰랐어. 내가 죽을 때까지도 그 말뜻을 몰랐어.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었나 봐. 생각 없는 내 행동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 내가 바보는 바보인가 봐. 아빠. 아빠. 아빠 나 이제야 아빠가 한 얘기를 알았어. 이제야. 죽은 다음에야. 갑자기 아빠가 보고 싶어. 그 동안 잘 몰랐는데 아빠 알아? 내가 아빠를 엄청 사랑했는가 봐. 그래서 공연 때 아빠 오면 나 무지 떨었었어. 그래서 대사도 버벅이고 실수도 많이 했지. 가장 멋지게 보이고 싶은 순간이었는데, 아빠에게 인정받고 싶은 순간이었는데. 아들 없이 딸만 키우는 아빨 보면 왠지 모르게 미안했어. 다른 아이들처럼 같이 공도 못 차고 목욕탕도 혼자 가야 하고, 우리 아빠 등은 누가 밀어줄까? 여자들 사이에서 우리를 등에 짊어지고 묵묵히 걷던 아빠. 어깨가 너무 무겁지는 않았을까? 외롭지는 않았을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 나를 가장 사랑하는 남자. 아빠. 보고 싶어. 그리고 다시 아빠를 만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래. 아빠가 나의 첫사랑이라고.. 아빠.
모두 같이 잠깐…
혜숙
제발. 그만해라. 귀신 분위기 망가진다. 귀신이면 귀신답게 귀신으로서 명예를 지켜야지. 슬프다고 우는 귀신이 어딨냐? 그래서 네가 생각이 없다는 거야, 지지배야.
효진
그렇지만. 슬픈 걸 어떡해요? 내가 죽지 않았다면, 한 번 더 또 한 번 더 또 한 번 더 해볼 수 있을 텐데.
혜숙
어, 이거 갑자기 분위기 이상해졌네. 안돼, 안돼. 귀신은 귀신다워야 해. 우리에게 후회는 없어야 해. 우린 귀신이니까.
철수
맞아. 후회하면 안돼. 꿋꿋해야지.
혜숙
그래. 꿋꿋하게.
쏘리
그래. 어차피 죽었는데. 후회하면 뭐해. 난 죽었는데. 그래 난 죽었어. 난 죽었어. 난 죽었다고. 후회해도 소용없고 눈물 흘려도 소용 없어. 울어도 소용 없고 화를 내도 소용 없어. 난 죽었으니까. 아니야. 난 웃을 거야. 난 웃을 거야. 하하하하하.
효진
(갑자기) 아쉽다. (주저 앉아 운다.) 아빠 아빠 (소리 펑펑내서)
쏘리
(같이 울먹이고)
효진
(울면서) 나도 100을 향해 달리고 싶어.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그렇게 열심히 했던 그때가 그리워.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아쉬워. 살았던 순간을 그리워하며, 살았을 때 일을 반복하는 것도 너무 지겨워.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지만 나는 시간에 갇혀 있어.
혜숙
어쩌겠어? 그럴 수밖에 없잖니? 우리의 시간은 이미 지나갔으니까.
쏘리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고 살았을 때 끊임없이 들었지만 이렇게 죽고 나서야 알게 되다니…
효진
(갑자기 보희를 바라보며) 난 화가 나. 저 아이를 보면 화가 나. 난 여기 이렇게 죽어서 아무 것도 못하고 원망만 하고 있는데 쟨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잖아.
혜숙
그건 아니다. 쟤가 가지고 있는 게 뭐가 있니? 쟤는 단지 살아있을 뿐이야. 우리는 죽었고. 쟤가 다 가지고 있지는 않아.
효진
그게 그거잖아. 쟨 뭐든 할 수 있고 우린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쟨 언제나 100으로 갈 수 있고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언제나 0이고. 난 쟤를 죽여서 동생으로 데리고 다녀야겠어.
철수
참아. 왜 아무 죄 없고 열심히 살려는 애를 못살게 굴려고 해.
효진
아니야. 아니야. 나는 쟤가 싫어.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와 얘기하는 쟤가 싫어! 너 이리와.
효진의 분노가 폭발한다. 귀신의 무서움? 영화에서 보는 장면이 연출되거나 혹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에 따라 보희가 움직이거나… (앞의 혜숙 공포 씬에 이은 두 번째 공포 씬이다. 한 동안 지속된다.) 보희는 도망 다니고 하다가 나중에는 잡혀 효진 밑에 깔리게 되고 거의 죽이기 직전에. 모두 개입해 말린다.
효진
놔, 놔, 놔. 난 쟤를 죽이고 다시 살아날 거야. 놓으란 말이야.
철수
네가 쟤를 죽인다고 다시 살아날 수는 없고, 왜 아무 죄 없는 애를 죽인다고 난리니?
혜숙
그러지 말고 우리 다른 방법을 쓰자.
효진
다른 방법?
쏘리
그 왜 있잖아. 영혼을 파는 것. 그러면 너는 너대로 영혼을 팔고 쟤 인생에서 하루를 살 수 있으니까.
효진
정말? 내가 진짜 하루를 다시 살 수 있어?
쏘리
그럼.
효진
좋아. 하루를 다시 살 수 있다면 나는 뭐든지 할 거야.
혜숙
대신 넌 사라지게 돼.
효진
사라진다고? 괜찮아. 어차피 이렇게 이곳에 갇혀 아무 것도 못할 바에는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아. 차라리 하루를 100을 찾으며 살고 사라질래. 자 얼른 시작하자고. 무엇이든.
철수
쟤 좀 누가 말려.
효진
얼른 시작해. 나 또 화나게 하지 말고. (다시 찬 바람 불고…)
쏘리
알았어. 알았어. 시작합시다.
보희
저기 잠깐만요. 뭘 시작하는데요?
혜숙
응? 별거 아니야. 네 인생에서 하루를 쟤가 쓰게 될 거야.
보희
뭐라고요? 싫어요.
효진
싫어? 싫긴 뭐가 싫어. (또 다시 폭발한다.) 네가 살 수 많은 날들 중 단 하루만 내가 쓰겠다는데 그게 싫어? 넌 아직 수십 년 살 수 있어. 그리고 그 수십 년 동안 수 십 번 아니 수 백 번이라도 새로운 100을 향해 달려갈 수 있어. 한 두 번 잘못돼도 다시 일어서서 나가면 돼. 나는? 나는 여기에 갇혀 있어. 넌 내가 불쌍하지도 않니? 한 발짝만 단 한 발짝만이라도 앞으로 나가고 싶어도 단 할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내가? 이게 너와 나의 차이야. 이게 삶과 죽음의 차이야. 너는 뭐든 할 수 있고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내 삶이 그렇게 아쉬워서 내가 사라지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너의 하루, 단 하루를 살겠다는데 그걸 거부한다고? 그 하루는 너에게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잖아. 너에게는 수 많은 다른 날들이 있잖아. 수 많은 날들을 허비하고 버려도 또 다시 출발할 수 있는 날이 있잖아. 하지만 난 아무 것도 없어. 단 1초도 없어. 너도 죽어야겠어. 죽어봐야 네가 살아가는 동안에 단 하루가 단 1초가 얼마나 아쉽고 중요한지를 알게 될 테니까.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지 못한 걸 후회하게 될 테니까. 이리와. 너도 죽어야 해.
보희
(도망 다니며) 살려 주세요.
혜숙
누가 너 죽이니?
효진
이리와. 넌 여기서 죽어야 해.
보희
아빠
혜숙
(효진에게) 이제 그만하고 얼른 시작하자.
쏘리
(보희에게) 그리고 너도 이리와.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효진
얼른 시작해!
쏘리
알았어. 알았어. (철수에게 눈짓하며) 자 시작하자.
철수
오케이.
철수도 의식에 참여한다. 셋은 주문을 외운다. 효진과 보희를 중앙으로 몰아넣는다. 보희는 그들을 벗어나려 애쓰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주문)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100빼기 1은 0이라고
그러나 결과는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
살아있는 동안 100에 가려고 노력하는 것
인생은 0과 100의 끊임없는 반복
그것이 인생이다. 우리 인생
갑자기 큰 폭발음이 남과 동시에 모두 사라진다. (가능하다면 벽과 일체가 되어 벽에 붙어 있으면 좋겠다.) 무대 위에 보희가 쓰러져 있다. 잠시 후 트레이너 들어온다.
6
트레이너
(보희에게 다가가) 이봐요, 이봐요! 괜찮아요?
보희
(깨어나며 남자를 보더니 본능적으로 남자를 밀친다)
트레이너
(예상치 못한 공격에 쓰러진다) 아! 왜 그래요? 못 볼 거라도 본 사람처럼!
보희
네? (일어나 주위를 살펴본다.) 아무래도 제가 봐선 안 될 걸 본 거 같아요. 놀라셨죠? 죄송합니다.
트레이너
뭘 봤는지는 몰라도 첫인상은 확실히 강렬하네. 자, 보희씨 대표님이 테스트 좀 해 보라던데. 곡도 쓴다며? 어디 일단 직접 쓴 곡으로 하나 들어볼까?
보희
곡이요? 어떤 곡이든 상관없죠? 방금 곡이 하나 생각났는데 그것도 괜찮을까요?
트레이너
방금 생각났다고? 좋아. 어서 해봐.
보희 (노래)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100빼기 1은 0이라고
그러나 결과는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
살아있는 동안 100에 가려고 노력하는 것
인생은 0과 100의 끊임없는 반복
그것이 인생이다. 우리 인생
그러나 인생은 100이 아니야.
1도 아니고 0도 아니지.
하루를 1년처럼
하루를 100년처럼
그렇게 살아봐.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우리 인생을 살아봐.
나의 인생을 살아봐.
트레이너
(감동했지만 무심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지?
보희
예?
트레이너
지금 그 노래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고?
보희
아니 저는 그냥
트레이너
그래 그냥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고?
보희
그냥 제 느낌이..
트레이너
느낌이?
보희
그냥
트레이너
그 노래를 듣고 관객이 뭘 느끼길 바래? 또는 어떤 인상을 전달하고 싶은 거야?
보희
…
트레이너
희망이 뭐야?
보희
그거야 가수죠
트레이너
그냥 노래만 부르는 가수?
보희
…
트레이너
생명이 있어야지 목적이 있어야지 노래를 통해 도달하고 싶은 어떤 목표가 있어야지. 보희씨 노래 속에 어떻게 삶을 녹여 넣을까? 그리고 그 노래를 듣는 관객들이 어떻게 내 생각을 공유할 수 있을까? 이런 근본적인 것에 대한 철학이 없다면 그건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지. 그냥 기계가 되고 마는 거지. 예술가로서의 자존심, 그게 필요하지.
보희
저… 전… 그냥 얘기하고 싶습니다.
트레이너
무슨 얘길?
보희
제 노랠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100빼기 1이 99이든 100빼기 1이든 0이든 그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다구요. (남자를 쳐다본다.)
트레이너
(계속하라는 제스쳐)
보희
인생은 100을 향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온전히 살아가는 거라구요. 하루 하루를 1년처럼 100년처럼 1000년처럼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라구요. 죽으면 무엇을 하고 싶어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을테니까요.
트레이너
(침묵) 그게 보희씨의 생각인가?
보희
(사이. 자신없게) 네. (호흡을 가다듬고 당당한 목소리로) 아니요, 네. 네.
트레이너
(웃으며) 재미있는 아가씨네. 좋아. 여기서 기다려요. 대표님이랑 얘기 좀 하고 올테니까.
보희
네, 알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연습실 귀신들을 향해) 고맙습니다. 저를 지켜주셔서 … 열심히 살게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