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USICAL PLAY
김균형 작 
김서경 곡 
등장인물
여자1 은정 대학교수
여자2 은숙 대기업 부장
여자3 미선 카페운영
여자4 진선 전업주부
남자 다역
무대
어딘가에 있는 나지막한 산. 처음 시작은 시골 어떤 간이역.
삶에 대한 이야기.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하기에 적당한 이곳 저곳.
폰트칼라
대사 검은색
해설 지문 푸른색
가사 주황색 
1 프롤로그
노래1 아줌마 – ALL
손 뻗으면 닿을 곳 멀지 않은 나의 과거
산들바람 꿈꾸고 설레고 그립던 날들
사랑하고 기뻐하고 즐겁던 날들
손 뻗으면 닿을 곳 이십 년 전의 내 모습
비오고 바람이 불면 온통 걱정에 가득 찬
종일 걱정만 안고 사는 지금 내 모습
집안 일 걱정 아이 걱정 걱정이 마를 새가 없는
언제나 걱정 속에 사는 나는 아줌마
피부가 말라가고 일자 몸매 되더라도
아직 나에겐 뜨거운 피가 흐른다
주름이 더욱 깊어지고 내 삶이 의미 없다 해도
아직 나에겐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어
아무도 날 돌아보지 않더라도
내 삶이 지루하고 의미 없어 보일지라도
그러나 아직 이 가슴 속 많은 것 남았어
멈추지 않은 청춘의 꿈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내 꿈
노래 끝. 암전.
2 간이역
새벽, 시골 간이역 광장. 네 여자 등에 배낭을 메고 등장한다.
은정 
어머, 정말 조용하다.
은숙
그러게. 그런데 아무리 간이역이 됐어도 그렇지 어떻게 역무원 한 사람 없니?
미선 
너무 낭만적이다 얘~~ 20년 동안에 너무 분위기 있게 변했어.
진선 
그래 너무 좋다.
은숙 
내가 기대했던 건 이게 아닌데. 이건 완전히 무인도가 됐네. .
미선
무인도면 어때? 난 사실 이런 곳을 동경했어. 모든 것에서 떠나 이런 곳에 자리 잡고 나 하고 싶은 일이나 하면서.
진선 
(미선을 제지하며) 흥분하지 마라. 우린 가출한 게 아니야. 곧 돌아가야 한다고! 그리고 (은숙에게) 어디 얘기 좀 해봐라. 굳이나 오늘 꼭 이렇게 등산을 와야 하는 이유가 뭐니?
은숙 
왜 오늘이냐고? 너희들 기억 안나? 20년 전 우리 여기 왔었잖아. 그리고 20년 후 오늘 다시 올라가기로 했잖아. 그 20년 후 오늘이 바로 오늘이야.
은정 
그랬어? 모르고 있었네. 미안하다.
미선 
역시 대기업 부장답다. 어떻게 그런 걸 기억하고 있니?
은숙 
사실은 오늘을 기억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거든.
진선 
또 다른 이유? 뭔데?
은숙 
나중에 얘기해 줄게.
진선 
그러지 말고 얘기해 봐.
은숙 
(분위기를 바꾸며) 근데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대학 때 동해바다 놀러 갔던 거 생각나지 않니?
미선 
아! 일학년 가을에? 맞아, 그때도 기차 타고 갔었지.
은정 
그래 그 초록색 느려 터진 통일호 열차 타고….
은숙 
무지하게 재미 없었지. 남자들 빼놓고 가서 고생만 엄청 하다 왔잖아.
은정
야, 그때 미선이 옷차림 생각나니?
은숙. 
어떻게 잊겠어!
은정 
레이스 달린 원피스에 챙 달린 모자에
은숙. 
방울 달린 삐딱 구두에, 진짜 가관이었어.
미선 약간 이상하게 바뀌며
미선. 
그때 그 바다 정말 낭만적이었어! 부딪히는 파도소리, 새하얀 갈매기
은숙 
얼씨구.
미선. 
푸른 바람이 내 귓가를 스치고
은숙. 
잘한다.
미선. 
파도가 날 오라 부르는데 정말 따라 들어가고 싶었어.
은숙. 
난 널 밀고 싶었어.
미선 
철썩
은숙 
철썩
미선 
철썩
은숙 
철썩
진선 
잘들 논다. 그만해라.
미선 
철썩
은숙 
철썩
진선 
그만하라고!
미선 
철썩
은숙 
그만 하라잖아!
미선 
철썩
은숙 
한 손에 모자 한 손엔 레이스를 잡고
미선 
철썩
은숙 
뾰족 구두가 바다 모래에 빠져 기우뚱거리며 걷는
미선 
철썩
은숙 
아, 그 모습
미선 
철썩
노래2 살랑여 – 미선
살랑여 살랑 산들 바람 내 귓가를 간질러
저 바달 바라봐 우리에게 손짓하는 저 푸른 물결을
삶이란 별게 아니야 편하게 쉽게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 생각 모든 것을 보다 쉽게 생각해봐
귀를 열고 마음껏 들어봐 더 많은 것이 들릴 거야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 봐 더 많은 것이 보일 거야
일상으로부터 떠나야 해.
은숙 
참아라. 우린 20년 전 대학생이 아니다.
미선. 
넌 진짜 낭만을 모른다. 그렇게 살면 좋니?
은숙. 
좋다.
은정. 
야, 그만해라. 그러니까 쟤는 젊게 살잖아
은숙. 
그래, 그래도 넌 진선이보단 양호했지.
진선. 
내가 뭘?
은숙. 
너 기억 안나? 그 가을 너의 만행이?
진선.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음식도 만들고, 얼마나 즐겁게 놀 수 있도록 배려를 했는데? 만행이라니?
은숙. 
그래, 니가 뭔가 준비를 하긴 했지. 압력밥솥, 프라이팬, 버너, 도마, 칼, 석유, 코펠, 김치, 밀가루, 밑반찬, 호박, 오이, 당근, 된장, 담요, 침낭, 배낭, 텐트, 근데 왜 쌀을 안 가져와서 우릴 쫄쫄 굶기냔 말이야.
진선. 
글쎄다, 나도 고것이 참 미스터리다. 나는 분명히 챙겼거든. 근데 왜 쌀이 없었을까?
은정 
다 뭔가 타당한 이유가 있겠지.
미선. 
그래도 밀가루가 있어서 수제비 해먹었잖아. 그 수제비 진짜 맛있었는데.
은숙. 
그게 수제비였니? 물이 너무 많아서 거의 계란탕 수준 아니었어? 그리고 그것뿐이 아니야. 자기만 믿으라고 해서 총무시켰더니 회비를 홀랑 집에 놓고 와?
진선. 
글쎄다. 고것이야 말로 진짜 미스터리다. 분명 주머니에 챙겼거든. 근데 왜 책상 위에 있었을까?
은정. 
그래. 다 뭔가 타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은숙 
야, 넌 자꾸 무슨 타당한 이유를 찾아?
은정 
응? 글쎄 다 뭔가 타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니까.
은숙 
은정아!!
역무원 차림의 남자 갑자기 등장 조명 바뀌고 20년 전 기차여행. 기차 소리,
남자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동해바다행 느려 터진 통일호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승차권을 소지하신 승객께서는 얼른 승차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래3 어릴 적 그 때 – 미선 / 합창
우리의 과거 우리의 철 없던 시절 여행길 한 없이 부풀었던 꿈
기차를 타고 우리는 바다로 떠났어 그리고 달렸어 희망으로
우리의 젊은 시절 근심 걱정 없던 시절 희망과 미래만이 있던 그 시절
가진 것은 없었지만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행복했어 꿈들이 있었으니
우리에겐 청춘이 있었으니
남자 청춘예찬이 쓰인 족자를 들고 나와 낭독한다.
남자 
청춘예찬. 민태원.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꼭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보라, 청춘을! 그들의 몸이 얼마나 튼튼하며, 그들의 피부가 얼마나 생생하며, 그들의 눈에 무엇이 타오르고 있는가? 우리 눈이 그것을 보는 때에 우리의 귀는 생의 찬미를 듣는다. 그것은 웅대한 관현악이며, 미묘한 교향악이다. 뼈 끝에 스며 들어가는 열락의 소리다. 청춘은 인생의 황금 시대다.
우리의 과거 우리의 철 없던 시절 여행길 한 없이 부풀었던 꿈
기차를 타고 우리는 바다로 떠났어 그리고 달렸어 희망으로
우리의 젊은 시절 근심 걱정 없던 시절 희망과 미래만이 있던 그 시절
가진 것은 없었지만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행복했어 꿈들이 있었으니
우리에겐 청춘이 있었으니
노래 끝. 암전.
3 등산
집. 진선의 상황. 의사소통이 안되는 집안의 모습. 장면 끝에 은숙 나타나 전화. 등산 가자고
노래4 산이 부른다 – 진선 / 합창
산 산이 우릴 부른다 산 산이 우리들을 부른다
비오듯 흐르는 땀 턱까지 차오른 숨
힘들어 힘들어 힘들어 힘들어 한걸음 떼기도 힘들어
왜 길을 나섰을까 그냥 집에서 쉴 걸
힘들어 힘들어 힘들어 힘들어 더 이상 걷기도 힘들어
한 걸음 힘들어 쓰러지지 않고 이곳까지 올라온 것 만도 기적이야
우리는 오르고 있어 한 걸음씩 이 산을 한 걸음씩 이 산을
진선이 마지막 쓰러질 때 나머지도 모두 등장하며 쓰러진다.
진선 
나는 이제 도저히 못 가겠다. 벌써 다리가 후들거려서 오도 가도 못하겠으니까 너희들이 책임져라. 난 못 간다.
은정 
얘 왜 이러니? 이제 겨우 5분 올라왔어.
미선 
얘, 아줌마 티 내는 것 봐! 아줌마, 품위를 지키세요..
진선 
니들이 뭐라고 해도 좋은데, 하여간 난 더 이상 못 간다.
은숙 
너 집안에 틀어박히더니 너무 심하다.
진선 
너희들도 집안에만 있어봐.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니까. 너희들은 활동을 하니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또 그렇게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잖아. 그런데 나는 하루 종일 집안에만 틀어박혀서 아무 것도 못하고 있어. 너희들은 모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전업주부의 가슴 아픈 현실을..
은숙 
아프냐? 나도 아프다. 너의 그 흐르는 배하며 암울한 피부하며.. 쯧쯧
미선 
(진선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며) 너 이제 보니까… 검버섯이야? 어쩜 좋니. 너 그러다가 남편이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리면 어쩌려고 그래..
은정 
땍! 무슨 그런 얘길! 돌리지! 당연히 돌리지! 돌아가지! 미치지! 한번이면 감사하다 하고 그냥 살아야지.
진선 
뭐? 내 몸매가 어때서? 내 피부가 어때서? 이만하면 양호한 거지.. 니들은 거울도 안보니? 니네도 마찬가지야. 자고로 사람은 나이 먹은 만큼 들어 보여야 하는 법이야.
은정 
맞아! 그런데 너는 니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니까 그게 문제지.
미선 
그러니까 남자들이 젊은 여자를 찾지. 그게 다 자기관리를 못한 탓이야. 니네 그거 알아?
진선 
뭐?
미선 
남자들이 여자랑 아내를 다르게 생각하더라..
은숙 
어떻게?
노래5 여자 – 미선
눈을 크게 그리고 긴 속눈썹을 붙이고 붉은 색 볼연지 눈가엔 보라색
깨물어 주고 싶은 앵두 같은 입술로 동그란 얼굴 살포시 웃는 미소
시선을 뺏는 사랑하고픈 바로 그 사람 여자
최고급의 란제리 과감하게 노출을 가슴엔 뽕브라 식사는 조금만
웨이브진 머릿결 살랑살랑 흔들며 시선은 15도 살며시 윙클 날려
여자가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이 세상 못난 아줌마들아
여자가 나가신다 무릎 꿇어라 나는 여자 사랑 받고픈 여자
나는 여자 사랑 받고픈 여자
미선 
그런데 아내는? 아내는 호르몬이 달라지잖아. 우리, 어디서든 용감하잖아?
은숙 
그래. 맞아. 아줌마. 용감한 아줌마!
노래6 아줌마 / 진선
아줌마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나는 용감한 아줌마
아줌마 나가신다 모두 덤벼라 난 아줌마
불가능이란 없어 난 아줌마 씩씩한 아줌마
아줌마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한땐 에스라인이었다
나이를 먹어봐라 웃고 있구나 긴장해라
우리들도 웃었다 대한민국 이끄는 아줌마
미선 
한 마디로 여자는 자기관리를 할 줄 아는 존재고, 아내는 용감한 싸움닭이라는 거지. 남편도 남잔데 용감한 싸움닭이 여자로 보이겠니?
은숙 
그래! 그래서 여자든, 남자든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을 갈고 다듬어야 하는 법이야. 현대사회에서 자기관리는 필수항목이지. 필수! 자기관리가 없는 사람은 사회에서 낙오하게 된다고.
진선 
그래, 그래 사회란게 그런 거지. 자기 관리를 잘 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지. 그런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
멋진 남자를 하나 찾아 객석으로 가서.
노래7 나는 아직 청춘 – 진선
피는 꽃을 보며 감탄하고 아침 이슬에 눈 붉어지고
기차 타고 멀리 여행도 떠나고 시청 앞 분수대에 걸터 앉아
아직도 청춘 너희들과는 다른 세상 너희들의 청춘은 이제 모두 사라졌어
나는 아니야 나는 아직도 꽃다운 청춘 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여자로 봐
나는 달라 나를 여자로 봐 여자 여자 나를 여자로 봐 여자 여자
미선, 
누가 널 여자로 보니? 니 남편?
진선. 
아니, 우리 옆 집 사는 중후한 작가 분이.
은숙. 
중후한 작가? 혹시 60대?
진선. 
핸섬한 얼굴에, 분위기는 완벽하게 리차드 기어 라니까.
벨 소리 딩동. 여자 진선 앞으로 나선다. 분위기 있는 그 남자 등장.
진선
누구세요?
남자
예, 저 옆 집에 이사온 사람입니다.
진선
예, 안녕하세요?
남자
이사온 지 좀 됐는데, 인사가 늦었네요. 저기, 저…
진선
네?
남자
저기, 저…
진선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남자
아, 아닙니다. 그럼.
진선
네. (문을 닫는다)
잠시 사이. 다시 벨소리.
진선
누구세요?
남자
예, 저 옆집 사람입니다
진선
예, 무슨 일로…
남자
저, 저, 저기…
진선
말씀하세요…
남자
저기…. 아닙니다.
사이. 다시 벨소리.
진선
누구세요?
남자
예, 저 옆집 사람입니다.
진선
네, 왜 그러시는데요?
남자
저, 초면에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차 한 잔 주시겠습니까?
진선
(당황하며) 네?
남자
저, 다른 게 아니라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진선
부탁이요? 무슨 부탁이신데요?
남자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진선
그래요? 그럼 일단 들어오세요.
남자
네, 고맙습니다.
진선
그런데, 무슨 부탁을…
남자
혹시 요즘 재미있게 보신 영화가 있으십니까?
진선
영화요?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는데요.
남자
네, 그렇군요. 실은 제가 시나리오를 씁니다.
진선
그럼 시나리오 작가세요?
남자
네, 그런데 잘 풀리지가 않아서요. 부인께 도움을 좀 청하고 싶습니다.
진선
제가 어떻게…
남자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조금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진선
글쎄요. 제게 그런 능력이 있을지… 그런데 어떤 내용의 영화인데요?
갑자기 끼어든다.
은정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니?
진선
내가 뭐, 자기 시나리오의 여자 주인공 모델이라나?
은정
은숙 미선 (동시에 헛 웃음)
진선
그래서 나의 인생 얘기를 깊이 있게 아주 심도 있게 알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뭐, 이것 저것 얘기 해 줬지. 그리고 나서 그 사람이 뭐랬는지 알아?
은정
(앉아있는 남자에게) 돈 꿔달래지?
미선
(앉아있는 남자에게) 사기꾼 아니야?
은숙
(앉아있는 남자에게) 사기꾼이네! 사기꾼이구만!
남자 헛기침을 하며 퇴장
진선
(퇴장하는 남자를 아쉬워하며) 아니야. 내 얘기가 마음에 든다고 계속 도움을 달라는 거야. 근데, 그 사람 아무래도 시나리오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나한테 더 관심이 있는 것 같더라고.
미선
그래? 그 사람 취향 참 독특하다.
진선
나도 바람이나 한 번 피워볼까?
은숙
그래, 네 멋대로 한 번 해봐라. 그게 그렇게 쉬운 건 줄 아니?
은정
너, 요즘에도 그 작가, 자주 너희 집에 왔다 갔다 하니?
진선
가끔, 왜? 걱정되니?
은숙
걱정은 무슨 걱정할 거 하나 없다. 설마 쟤가 바람이라도 피울라고, 그냥 하는 소리겠지.
미선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안 피울 것 같은 사람이 원래 더 잘 피우는 법이야.
분위기 살짝 이상하게 바뀌며 진선 자기 얘기를 한다. 처음과 끝이 다른 얘기.
노래8 나도 바람이나 필까? – 진선
저녁이 되면 난 모두를 기다리고만 있지 모두들 늦는 매일 밤
하염없이 혼자 앉아서 커다란 식탁에 홀로 앉아 티비를 보며 밥을 먹는 나
내 주변엔 아무도 없는 거야 결국 난 혼자 남아 결국 난 혼자 남아
이 변화 없고 외로운 삶에서 벗어나고만 싶어
나에게 아직 뭔가 남아있는지 느껴보고만 싶어
내 속에 뭐가 있는지
은정
(위로하며) 아줌마에게도 고민이 많이 있네.
진선
그래. 사는게 너무 허무하다. 젊었을 땐 이렇지 않았는데. 애들 다 크고 매일 혼자 집 지키는 개 노릇만 하고 있으니까 모르겠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남편이 뭐 중요한 문제 의논이라도 하면 그렇게 반갑고 애들이 학교에서 있던 일 직장에서 있던 일 얘기하면 그게 또 그렇게 기뻐. 나도 집에서 나가거나 아니면 지금처럼 등산이라도 다녀야겠어.
은숙
아줌마! 기운 내. 사람들은 모두 힘들게 사는 거야. 나도 힘들고.
조명 바뀌면 열심히 일하는 은숙 그러나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듯 일을 접고 나서는데 여장을 한 섹시한 옷차림의 박대리(남자) 등장.
남자
안녕하세요?
은숙
밧대리! 너 지금 어디가?
남자
밧대리가 아니고 박대린데요!
은숙
암튼! 어디 가냐고?
남자
퇴근하는데요!
은숙
신제품 보고서는 어떻게 하고?
남자
그건 내일까지 드릴게요! 최이사님이 차에서 기다리신다고 해서…
은숙
왜? 최이사님 차가 방전이라도 됐대?
남자
아니 집이 같은 방향이라고 태워주신다고……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징징대는 말투로) 네 이사님. 지금 엘리베이터 앞인데요…… 김부장님이 보고서 오늘까지 제출해야 한다고…. (목소리 바뀌며) 바꿔달라는데요!
은숙
(경직된 자세로) 네, 이사님! 네! 아니 지난 번 그 일은… 아니 그게 치사한 게 아니고… 다른 직원들도 바빠서…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다시 바꿔주며) 밧대리 빨리 내려가봐. 방전되기 전에…
남자
(전화를 받아 들고) 네, 이사님! 금방 갈게요. (객석을 향해) 어머 김이사님! 아시죠? 내일 뵐까요? 좋아요. (퇴장)
은숙 내가 치사하다고?
노래9 치사하다고 – 은숙
치사하다고 내가 치사하다고 괜찮아 어떻게 올라온 자린데
치사하다고 내가 치사하다고 안되지 여우 짓에 이 자릴 뺏길 순 없어
문제야 문제 남자들이 문제야 문제야 문제 여자들이 더 문제야
공은 공이고 사는 사야 그걸 구별해야지
직장은 일하는 곳 프로답게 근성을 가지고 직장은 일하는 곳 직장은 일하는 곳
내가 젊었을 때 무시만 당했어 내게 혜택은 없었어
커피 복사 잔심부름 그게 나였어 나의 젊을 적
무시했어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들과 나의 세계가 달랐어
나는 바쳤어 내 청춘을 악착같이 일을 했어 일을 했어
문제야 문제 남자들이 문제야 문제야 문제 여자들이 더 문제야
공은 공이고 사는 사야 그걸 구별해야지
직장은 일하는 곳 프로답게 근성을 가지고 직장은 일하는 곳
직장은 일하는 곳
미선 
너 스트레스 많이 받겠구나. 그 밧데리 때문에.
은숙 
(열변은 토하며) 스트레스가 다 뭐니? 내가 입사 8년 만에 대리 달고 그 후에도 또 8년이나 기다려서 만년대리 면했잖아? 그런데 재작년에 졸업하고 들어온 기지배가 올해 벌써 대리를 단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정말 인생 갑자기 허무해지더라. 억울하더라. 당장 사표 썼다. 그런데 내지는 못하고…… 나 그날 정말 많이 울었다.
미선 
사회가 왜 그런다니 정말. 하여간 그 남자들 큰 일이야. 아직도 우리 나라에서는 여자가 일하기가 쉽지 않아.
은숙 
그렇다니까 그 남자들이란 게 도대체 뭘 알고 있는지 모르겠어. 정말 세상의 철없는 철부지들이야. 정말 알 수가 없어. 이해가 안돼. 그냥 생긴 것만 반반하면 아무런 생각을 못해요. 그냥 눈 웃음 한 번 주면 그걸로 끝이더라니까. 아니 도대체 남자들은 왜 그런다니? 정말 이 세상 남자들은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똑같아.
미선 
그래 맞다. 그 확 그냥 저 거 이 어쩜 하여간.,
은숙 
하여간 남자는 안돼.
남자 등장. 남자 손에는 “이런 남자 미워요”라 쓰인 피켓. 은숙 마치 카메라 앞에서 눈이라도 가린 듯
남자
이상한 소문을 내고 다니는 남자!
은숙
(얼굴을 가린 채) 글쎄요. 저 남자가요. 저와 8살이나 연상이고 애가 세 살인 유부남 직장 상사와 바람이 났다고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닙니다.
남자
바쁠 때마다 아파지는 남자!
은숙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있잖아요. 저와 입사동기 남자가 있는데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갑자기 아프데요. 구토증상이 있다고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하기도 하고. 그런데 야유회나 외국 출장은 정말 너무 잘 다니는 것 있죠.
남자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남자!
은숙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참 나! 저 친구는요. 팀원 전체가 야근해야 한다거나 희생을 해야 할 때면, 어머니가 아프시다, 머리가 아프다, 집안에 제사가 있다 아주 가지가지 이유를 대는 미꾸라지에요.
남자
여자만 보면 환장하는 남자!
은숙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정말 미칠 일이에요. 남자 직원들끼리는 별로 말도 잘 하지 않다가 여자 직원만 보면 그렇게 상냥하고 후배들 교육시킬 때도 남자들에게는 땍땍거리다가도 여자 후배들에게는 그냥 사족을 못쓰는.
갑자기 남자를 바라보며 그를 쫓는다. 남자는 은숙에게 잡혀 모진 고초를 겪는다.
은숙
옆의 동료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면 대 놓고 무시하는 남자!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동료의 공까지도 가로채는 잘난척 하는 남자! 동료 앞에서는 손 하나 까딱 않다가 상사 앞에서는 성실하게 변하는 남자! 대충해도 월급은 나온다는 식으로 일하는 남자! 이런 남자 미워!!! 하여간 남자는 안돼! 도대체 남자는 왜 그러니? (객석을 보며) 하여간 남자들 조심해.. 나중에 나이 들어서 자기 손으로 밥 한끼 제대로 못해 먹고 빨래도 못하면서 인생 후줄근해졌을 때 마누라 찾으며 후회 말고 똑바로 해!!!
노래10 큰일이라고 – 은숙
큰일이라고 정말 큰일이라고 이세상 남자가 문제를 만들지
큰일이라고 정말 큰일이라고 남자는 뭐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어
문제야 문제 남자들이 문제야 문제야 문제 정말 큰 문제야
말은 잘하고 일은 안하지 그게 남자들이지
할 일은 정확하게 프로답게 근성을 가지고 할 일은 분명하게 할 일은 분명하게
문제야 문제 남자들이 문제야 문제야 문제 정말 큰 문제야
말은 잘하고 일은 안하지 그게 남자들이지
할 일은 정확하게 프로답게 근성을 가지고 할 일은 분명하게 할 일은 분명하게
은숙 
내가 여성 전용 회사 만들어서 아주 못생긴 여자들만 가려 뽑고, 승진시킬 거야. 그리고 예쁜 여자들은 모두 나처럼 10년 20년 푹푹 썩힐 거야. 하하하
새소리 등과 더불어 암전.
4 약수터
조명 인되면 약수터. 약수터에서 물 마시며 “등산 가자”부터 현재까지의 상황
노래11 여행을 떠나자 – 합창
일상이 지루할 때 생각하는 것 그건 여행 일주일 정도 실컷 쉬면 좋겠어 편안하게
흥청망청 즐기고 아무 것도 없이 모든 걸 잊게 하는 여행을 가자
우리의 과거 우리의 철없던 시절 여행길 한 없이 부풀었던 꿈
기차를 타고 우리는 바다로 떠났어 그리고 달렸어 희망으로
일상을 벗어나 이 순간을 채우자 일상을 벗어나 이 순간을 채우자
최고의 선택 여행 최고의 선택 여행
은숙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여기서 조금 쉬었다 가자.
은정
그래.
미선
(은숙에게) 오랜만에 걸어서 그런지 정말 힘들다. 근데 너 아직 승진할 때 안됐니?
은숙
승진? 얘는, 승진이 뭐 좋은줄 아니? 승진하면 곧 옷 벗어야 돼.
진선
그래, 그거 우리 남편도 항상 하는 얘기야. 내가 “당신은 언제 승진해?”하고 물으면 곧바로 그렇게 대답한다니까. 승진하면 곧바로 옷 벗을 준비해야 된다나?
은숙
우리 같이 일하는 여자들에게 승진이란 동경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지.
진선
그래 맞아. 우리 남편 회사에 여자 부장 하나 있었거든. 그런데 얼마 전에 회사가 어려워지니까 가장 먼저 나가더라. 하여간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여자가 일을 하는게 쉬운게 아니라니까.
미선.
그런 걱정에서 벗어나 그냥 즐기며 살면 좋을텐데.
은정
야, 그게 뭐가 편하니? 난 지난 번 안식년 동안 조금 여유를 가지려 했더니 오히려 마음만 더 불편하더라. 뭔가 해야 되는 것 같은데 막상 하려고 하면 뭔지 모르겠고. 또 가만히 있으면 불안하고.
은숙
그래. 맞아. 그게 바로 현대인의 병이라는 거야. 나도 차라리 출근해 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게 낮지 휴일 같은 날 집에서 쉬고 있으면 오히려 더 불편하더라니까.
진선
맞아. 우리 남편도 어쩌면 너하고 그렇게 똑같니. 휴일 하루 집에 마음 편하게 있지를 못해요.
미선
야, 이런 얘기 그만하고 이제 산에 가자.
진선
그래. 난 빨리 갔다 와서 남편 저녁 차려주어야 해.
은정
그 남편 소리 좀 그만해라. 넌 언제나 그렇게 남편을 입에 달고 사니?
진선
나는 항상 남편과 함께 존재하니까 별 수 있어? 그건 나만 그런 건 아닐 텐데. (하며 은숙을 본다)
은숙
그거야 그렇지. 집에 가면 남편 있지 아이들 있지 또 회사에 출근하면 위 사람 아래 사람 모두 날 쳐다보고 있지.
은정
기분 전환하러 왔는데, 이건 도무지 생활에서 벗어날 수가 없네.
미선
그게 살아가는 재미 아니겠니? 사실 난 그런 경쟁이 없으니까 조금 늘어지거든.
은숙
웬일이니 니가? 세월을 낚으며 마음 편하게 살면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미선
난 사람 아니니? 나도 내 나름의 고민이 있고 생각이 있는 거야. 그래,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사실 나 요즘 고민이 있거든… 너네 입양을 어떻게 생각해?
진선
입양? 왜, 너 입양하게?
미선
아니 그냥 궁금해서.
은정
괜찮은 생각이지. 가끔 티비에서 아이들 입양하는 거 보면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들어. 자기 애도 키우기 힘들다고 애도 낳지 않는 추세인데,
은숙
그래, 정말 어렵지. 근데 그것도 있는 집 얘기지, 먹고 사는게 빠듯한 사람들은 생각도 못하는 얘기 아니니?
미선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애정과 의지의 문제가 아닌가?
은숙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봐.
미선
그럼 니 생각은 경제적으로 풍족하다면 문제가 안된다는 얘기야?
은숙
아니지 다른 문제들도 있겠지. 만약 니 나이에 입양을 한다면 아이가 성장을 하면서 겪을 상처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은정
하긴 나중에는 체력적으로도 힘들거야.
진선
(심각하게 고민하며) 나도 입양이나 해볼까? (친구들의 이상한 시선을 의식하고) 아니, 애들도 다 크고 나니까, 무슨 일을 하면서 살지 고민이거든. 그냥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 쓰면서 사는 것도 그렇고,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은데, 애 키우는 재미로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미선
그래서 말인데, 나도 예쁜 아이 하나 키우고 싶어. 아직 우리 사회 정서상 내가 아이를 낳는 건 좀 그렇고.
은숙
아서라. 니 나이에 무슨 아이를 낳냐? 그리고 누구 아이를 낳는다는 거야?
미선
얘는, 아이 낳는데 나이가 왜 필요하니? 얼마 전에 육십 몇 살 먹은 할머니가 쌍둥이 낳았더라.
은정
그건 티비에 나온 일부 예외적인 케이스지.
진선
그래. 내가 생각하기에도 니 나이에 아이를 낳는 것은 무리고. (그런데 이상함을 느낀다) 참, 그런데 너 뭐라고 했니? 아이를 낳는다고? 누가? 니가?
미선
아니 그냥 한번 생각해 본 것 뿐이야. 내 아이가 있으면 어떨까? 예쁜 딸 아이를 하나 낳아서 예쁘게 공주처럼 키우고 싶거든.
은숙
얘, 아이는 뭐 그냥 크는 줄 아니? 아이는 물만 준다고 크는 온실의 화초가 아니야. 아이를 키우는 건 뭐랄까… 그래 전쟁이야. 어려서부터 온갖 뒷치닥거리하면서 키우는 거야. 그리고 돈도 얼마나 많이 드는데. (갑자기 이상함을 느끼고 진선에게) 그런데 넌 왜 그런 생각을 하니? 너 혹시 남편하고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니?
진선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뭐랄까? 그냥 허전해. 우울하기도 하고.
은숙
너 큰일 났다. 갱년기 아니니?
진선
갱년기?
은숙
그래. 갱년기. 괜히 우울하지?
진선
뭐 꼭 그런건 아니지만
은숙
예 아니오로 대답해. 우울해 안해?
진선
아니 그러니까 꼭 그런건…
은숙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라니까. 봉진선씨는 우울합니까? 안합니까?
진선
그만해. 무슨 의사 놀이라도 하니?
은숙
그게 아니라니까. 그 갱년기 그거 심각한 거야. 잘못하면 자살도 하는 거라고.
진선
나도 알아.
은숙
그러니까 대답해 봐.
은정
그래 한번 대답해 봐라. 우리도 결과 좀 보자.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 등장.
남자
어서 오십시오.
진선
안녕하세요?
남자
살기가 어떠세요? 요즘.
진선
글쎄요. 그냥 우울하고.
남자
그렇죠? 피곤하기도 하시고
진선
예.
남자
식욕도 별로 없으시고.
진선
예
남자
매사에 의욕도 별로 없으시죠?
진선
예.
남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고 집중력도 떨어지고 기억력도 떨어지고.
진선
예
남자
괜히 짜증나고 괜히 긴장되고
진선
그렇다니까요.
남자
남편하고는 몇 번이나?
진선
네?
남자
같이 주무시나요?
진선
그거야 당연히 매일 같이 자죠.
남자
그냥 손만 잡고 주무시나요? 아니면?
진선
주로 손도 안 잡고 그냥 잡니다.
남자
그러니까 한 달에 몇 번 정도?
진선
한 달에 몇 번이요?
남자
예.
진선
한 달에 몇 번이 아니라 몇 달에 한 번 정도.
남자
예.
진선
아무도 저에게 관심을 같지 않는 것 같아요.
남자
예.
진선
애들도 모두 저한테 무관심하고.
남자
예.
진선
남편은 집에 들어오면 잠만 자고.
남자
예.
진선
저에게 전화하는 친구도 별로 없고.
남자
예.
진선
그리고 온 몸이 다 아픈 것 같고.
남자
예.
진선
느닷없이 심장도 뛰고 얼굴도 빨개지고
남자
예
진선
매사에 관심이 없어요.
남자
예.
진선
내가 여자가 맞나 싶기도 하고
남자
예.
진선
그냥 짜증만 나요.
남자
예.
진선
화가 나요.
남자
예.
진선
정말 화가 난다구요.
남자
예.
진선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나를 화나게 만들어요.
남자
예.
진선
남편도 보기 싫고 아이들도 보기 싫어요.
남자
예.
진선
그냥 다 팽개치고 혼자 살고 싶어요.
남자
예.
진선
그냥 어디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서 숨도 쉬지 않고 그냥 누워 있고 싶어요.
남자
예.
진선
뛰어 내리고 싶어요.
남자
예.
진선
다 부수어 버리고 싶어요.
남자
예.
진선
너무 허무해요. 내 인생이 너무 허무해요.
남자
예.
진선
내가 뭘하고 살았나? 앞으로는 뭘하고 살까? 정말 한심하고 막막해요.
남자
예.
진선
다 털어 버리고 싶어요. (흑흑흑)
노래12 벗어나고 싶어 – 진선
벗어나고 싶어 벗어나고 싶어 지금 이 자리 내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벗어나고 싶어 아무도 없는 내 삶에서
모두가 내게 무관심하고 아무도 나를 아는체 않고
전화도 없고 온 몸이 아프고 내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짜증나게 해 나를 화가 나게 해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뛰어 내리고 싶어 부숴버리고만 싶어 숨도 쉬고 싶지 않아
짜증나게 해 나를 화가 나게 해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뛰어 내리고 싶어 부숴버리고만 싶어 숨도 쉬고 싶지 않아
숨도 쉬고 싶지 않아
허무해 허무한 내 인생 뛰어 내리고 싶어 털어버리고 싶어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하고 이렇게 살 수 없어
벗어나고 싶어 벗어나고 싶어
암전. 그리고 막간.
5 아련히 떠오르는
암전에서 전화벨 소리 남자 대사와 더불어 조명 인.
남자
여보세요?
은정
네.
남자
김은정씨?
은정
네. 그렇습니다만 …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남자
임호준입니다.
은정
…
남자
여보세요.
은정
네. 압니다.
남자
정말 오랜만입니다.
은정
그러네요.
남자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은정
그냥 뭐 …
남자
바쁘신가요?
은정
그냥 뭐.
남자
그러세요?
여자
그런데 어떻게 절 찾으셨어요?
남자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이 있으니까요.
여자
네.
남자
혹시 제가 전화하리라 생각하셨나요?
여자
글쎄요.
남자
여전하시군요. 대답을 잘 안하시는 건.
여자
글쎄요.
남자
그게 은정씨 매력이었는데.
여자
글쎄요.
남자
우리 함께 여행도 많이 갔었죠.
은정
그랬죠.
남자
혹시 몽쁠리에 기억나세요?
은정
아-
남자
기억하세요? 그 아름다운 바다 빛
은정
아
남자
신이 이 지구상에 만들어 놓은 가장 아름다운 색깔이라고 했죠.
은정
아
남자
그 에메랄드 빛
은정
아
남자
지중해
은정
아
남자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죠.
은정
아.
남자
만나고 싶습니다.
은정
…
남자
듣고 계신가요?
은정
글쎄요.
남자
다시 연락을 하겠습니다.
은정
(끊어진 전화에 대고 약간 급하게) 저기요….
노래13 아련히 떠오르는 – 은정 / 남자
아련히 떠 오르는 젊음의 기억 잔잔한 파도로 다가오는 지난 날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 내 젊은 날의 기억
우린 떠났어 여행을 둘이서 바다에 도착해 백사장을 거닐었고
밤바다 달빛 아래 황홀한 키스 아 사랑 아 사랑아
사랑이 내게 힘을 주었고 내게 의미 주었어
사랑이 나를 지켜줬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줬어
그대가 있고 내가 있고 우리가 함께 있었어
서로 손 잡고 서로 바라보며 우리는 함께 했었어
지금 이 순간 시간이 멈추었던 그 때 그 순간 우리의 사랑으로
살아갔었어 우리의 사랑으로
노래 끝나고 아름다운 사랑의 한 순간 암전 후 막간 남자 퇴장하면.
진선
(끼어들며) 잠깐. 그러니까 10년 전 프랑스에서 사귀던 애인이 갑자기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만났어?
은정
아니. 아직.
은숙
아직이라니? 아직 연락이 없었어?
은정
응.
진선
뭐가 그러니? 다시 연락을 하겠다더니 아직 연락을 안하고 있다는 말이야?
은정
글쎄. 곧 연락이 오겠지.
미선
연락이 오면, 만날 거야?
은정
글쎄 생각 중이야.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못 내렸거든.
진선
생각할게 뭐 있니? 그냥 만나는 거지.
은정
만나서? 어쩌라구?
미선
그래 만나서 어쩌라구?
진선
어쩌긴 뭘 어째? 그냥 니 마음이 시키는대로 하면 되지.
은숙
아니야. 그건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기게 된다구.
미선
맞는 얘기야. 내 생각에는 안 만나는 것이 더 좋겠다.
진선
왜?
은숙
글쎄, 뭐랄까? 얘 마음 상태가 어떤가에 달려있겠지만.
미선
그래 한번 확인해 보자. (은정에게) 지금 네 마음 상태가 어떠니?
은정
내 마음 상태?
은숙
그래. 만일 네가 쓸쓸하거나 외롭거나 또는 뭐랄까 인생의 허탈감을 느낀다면 아마도 너의 만남이 순수하게 옛정을 그리는 정도에서 끝나지는 않을 거야.
은정
무슨 말이야? 그럼 내가 불륜이라도 저지르게 된다는 거야?
은숙
가만히 생각해 봐. 30년 만에 만나는 거야. 그리고 만나는 모습은 우리가 사는 머리 아프고 복잡한 오늘 현재 이 시점이 아니라, 30년 전의 맑고 어린 동심 그대로 다시 만나는 거야. 그러니 만일 가정에 문제라도 있거나 아니면 흔히 얘기하는 갱년기라도 겪고 있는 여자들은 그렇게 동심으로 편안하게 다가오는 이성을 거부할 수 있겠어?
진선
그래 그 말도 일리가 있겠다. 그러니까 너도 다시 그 옛날 애인을 만나면 그 애인의 그 옛날 모습으로 만나게 되는거 아니야?
은정
그렇겠지.
진선
그 동안 서로 떨어져 있던 동안의 시간은 사라지고 단지 옛날의 추억과 기억만으로 만난다는 것이 되잖아.
은정
꼭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되겠지?
진선
(스스로 분위기에 취해) 야, 너무 분위기 있다!
미선
만나지 마라. 잘못하면 너에게도 문제가 생긴다!
은정
아니야. 이성적으로 차분히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왜 문제가 되겠니?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은숙
그게 아니라니까. 갱년기의 여자들이 왜 제비족들에게 넘어가는데? 우리 세대가 위험한게 그거 아니야. 애들 다 커서 내 품을 떠나고 남편과도 무슨 새로운 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삶에서 무언가 대단하게 도전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슴 한 쪽이 뻥 뚫려 있을 때, 조금이라도 내게 잘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는 거야. 그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고. 다 알면서 당하는 거지.
은정
(친구들을 떠 밀어 내면서)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하고 등산이나 계속하자.
은숙
아니야. 얘길 시작했으면 마무리를 지어야지. 끝도 안내고 마치려고?
은정
가면서 얘기하고 얼른 일어나자.
미선
(무대 밖으로 나가며) 그래. 가면서 얘기하자. 그런데 하여간 만나는 것은 안 된다.
은정의 전화 울린다. 은정의 상상. 호준 등장.
노래14 잊고 싶었어 – 호준
잊고 싶었어 모든 것을 지우고 싶었어 당신의 존잴
이미 떠난 당신 내 곁에 있지 않은 당신
너를 사랑한 나였어 우리의 행복한 추억 생각나
영원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건 욕심일까
내게 남겨진 당신 모습 함께 했던 수 많은 추억들
벗어나고 싶어 이 모든 것에서 진심으로 당신을 진심으로 당신을
은정
호준씨….
남자
보고 싶었습니다.
은정
저도요.
남자
언제나 은정씨와 함께 했던 생각 때문에 정말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은정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나도 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그리웠어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남자
은정씨가 떠난 후 난 정말 많은 방황을 했습니다. 속으로는 “잊어야지”를 외치며 정말 너무 그리웠습니다.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은정
미안해요. 미안해요. 나도 호준씨 많이 원망했어요. 연락이 되지 않았을 때 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당장이라도 파리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어요. 미안해요. 호준씨. 우리 다시는 헤어지지 말아요. 우리 이렇게 영원히 함께 살아요. 그리웠어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노래15 지금 여기 / 은정 호준
지금 여기 그대와 단 둘이 이렇게 여기 다시 만나서
꿈 같은 오늘 이 순간 영원히 함께 하기를
눈이 내리면 좋겠어 우리의 아름다운 재회를 축복하는
믿을 수 없어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사랑 영원히
제발 꿈이 아니길 바랄게 이제 영원 속에서 함께 하기를
우린 믿어요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의 꿈이 되어
영원히 함께 해요 떠나지 말아요 이제 영원한 영원한 사랑
당신을 사랑해요 영원히 함께 해요 아름다운 우리 사랑
아름다운 사랑을
전화벨 계속 울린다. 남자 퇴장.
은숙
(다시 나타나서) 은정아. 뭐하고 있어? 빨리 안 오고.
은정
(깨어나며) 응. 갑자기 전화가 와서. (전화를 보며) 그 사람이야!
미선
(다시 무대로 뛰어 들어오며) 누구? 그 남자?
은정
응.
은숙
빨리 받아봐.
미선
받긴 뭘 받아? 받을 필요 없어!
은숙
가만 있어봐. 한번 얘기라도 들어보자. 무슨 얘기하나?
은정
잠깐만.
전화소리 끊어지고
미선
끊어졌어? 잘 됐어 앞으로도 받지마!
은정
그래. 별로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은숙
아니야. 꼭 그렇게 볼 수 만은 없는 일 아니니? 얘기가 잘 진행될 수도 있잖아.
미선
아니야. 괜히 잘못해서 쫓겨나지 말고.
은정
쫓겨나긴 왜 쫓겨나니?
미선
너 아직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것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 봐. 10년 만에 만나는 거야. 너 니 남편하고 아직도 신혼처럼 재미있게 사니?
은정
아니.
미선
애들 키우는 재미라도 있니?
은정
아니.
미선
아니면 네 인생에서 뭔가 대단하게 도전할 일이라도 있니?
은정
아니.
미선
가슴이 뻥 뚫려있는 것 같지 않니?
은정
그래.
미선
그렇지? 피곤하기도 하고?
은정
그래.
미선
식욕도 별로 없고 집중력도 떨어지고.
은정
그래.
미선
아무도 너에게 관심을 같지 않는 것 같고.
은정
그래.
미선
애들도 모두 무관심하고.
은정
그래.
미선
남편은 집에 들어오면 잠만 자고.
은정
그래.
미선
니가 여자가 맞나 싶기도 하고
은정
그래.
미선
그냥 짜증만 나고 화도 나고.
은정
그래.
미선
혼자 살고 싶고
은정
그래.
미선
뛰어 내리고 싶고
은정
그래.
미선
다 부수어 버리고 싶고
은정
그래.
미선
허무하지!!!!!!!!!
은정
그래.
미선
만나지 마라!!!!!!!!!
은정
그래도 만나서…
미선
그래도 만나서?
은정
글쎄…… 뭐 옛날 이야기도 하고……
미선
옛날 이야기도 하고
은정
사는 얘기도 하고……
미선
사는 얘기도 하고.
은정
그리고
미선
그리고
은정
그리고
미선
그리고
은정
그리고
미선
그리고
은정
그리고
미선
그리고
은정
(분위기를 바꾸어서) 그냥 집에 가겠지!!
미선
글쎄
은정
그리고 두 번 다시 서로 연락 안하고!!
미선
글쎄.
은정
일이 이렇게 진행된다고!!
미선
글쎄….. 또 만나게 되겠지?
은정
(망설이며) 글쎄
미선
그래서 만남이 반복되면…. 어떻게 되는데?
은정
(망설이며) 그러니까…. 글쎄
미선
(확인하며) 그렇지!! 할 얘기가 하나뿐이지? 아니야!! 이건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만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기게 된다고.
은정
(말을 돌리며)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하고 빨리 올라가자. (뛰어 나가고)
모두들 은정아를 외치며 퇴장하며 암전.
6 정상
조명 인되면 무대는 산의 정상.
미선
야 드디어 다 올라왔다. 내가 일등이다.
은정
(뒤 따라 오르며) 딱 20년 만이로구나.
은숙
(다음으로 들어오며) 그래도 너희들은 아직 힘이 있는가 보구나. 난 일하면서 모든 힘을 다 썼는지 도무지 기운이 없는데.
진선
(마지막으로 올라오며) 아이고 힘들어.
은숙
빨리 와라. 빨리 와. 이 아줌마야. 여기가 정상이다.
진선
그래? 아이고 사람 살려 (주저 앉는다)
여자 은정의 전화 울린다.
은정
(전화를 꺼내며) 어째 조용하다 했지. 지금까지 전화가 한번도 안 왔으니. (전화를 보며) 그 사람이야.
미선
누구? 그 남자.
은정
응.
은숙
빨리 받아봐.
미선
받긴 뭘 받아? 받을 필요 없어!
진선
가만 있어봐. 한번 얘기라도 들어보자. 무슨 얘기하나?
은정 잠깐만.
전화소리 끊어지고
진선
내가 보기엔 받아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한번 만나보는 거지. 그래서 옛날의 내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잖아.
은숙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네가 책임질래?
진선
무슨 문제?
은숙
무슨 문제는 무슨 문제냐? 아까 얘기했잖아.
은정
그런 문제가 아무에게나 생기니?
은숙
그렇다니까! 바로 아무에게나 생긴다니까! 그러니까 문제지. 아무에게나 생기는게 아니라 정해진 사람들에게만 생긴다면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니? 그런데 문제는 아무에게나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 바로 문제가 된다는 거야. 너 생각해 봐라. 세상에 생기는 모든 문제들. 그게 왜 문제가 되니? 정해진 곳에서 생기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문제가 안 생겨야 하는 곳에서 생기니까 문제가 되는 거지.
미선
그래. 그거 맞는 말이다. 그렇지 문제가 생기지 않아야 할 곳에서 문제가 생기니까 바로 문제가 되는 거지.
은정
그래도 나만 잘 처신하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니?
은숙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렇게 쉽게 생각한다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처신의 끝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할 때 바로 문제가 생기는 거라고. 그러니까 문제가 생길 소지는 아예 처음부터 잘라 버리는 거야.
은정의 회상. 혼자 외국으로 떠날 때 공항 멘트도 들어가고. 가서 고민하고 공부하고 괴로워 하고 그 때 남자 나타나…
노래16 그래도 뭔가 아쉬워 은정
공부만 했었지 한 눈 팔지 않고 조용히 살아 온 지난 날
규칙을 어기지 않고 술 마시고 취하지 않고 예쁘게 살아왔던 나
어느 날 내게도 어려움이 왔어 혼자 살아야 하는
너무나 힘들었고 고통스러웠어 그 때 그가 내 곁에 있어 주었어
내가 그리움에 한숨을 지을 때 나를 위로하고 지켜 주었어
그건 사랑 조건 없는 사랑 그 순간에 충실했던
만나고 싶어져 다시 온 그 사람을 사랑했던 그 사람을
모든 것이 지나간 과거일 뿐
그러나 정말 아쉬워 단 한 번 만이라도
은정
그래. 그래. 고마워.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래도.
미선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서) 아쉬움은 아쉬움으로 묻을 때 더 아름다운 거야. 너, 여자로써, 자신 있니? 너 니 얼굴 니 몸매 그 사람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 있어? 그리고 그 사람 변한 모습에 실망하지 않을 자신 있어? 나이 들어 쭈글쭈글하고 뱃살 늘어진 아줌마가 아니라, 김은정이라는 여자로써 두렵지 않냐고? 실망하고 실망 당하는 것이!!
은정
그래. 니 말 모두 이해해. 그 때가 말이야. 사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고 또 동시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을 거야. 그런데 내가 두려운 건 그 사람 다시 만나서 혹시 후회라도 하게 될까봐. 그러니까 그 사람과 헤어진 이후 내 삶이 더 행복하게 됐는지 별로 자신이 없어. 지금의 내 모습을 봐. 아무 것도 없어. 그냥 변화없이 … 그래서 그 사람 만나 혹시 후회라도 하게 될까봐. 내 인생이 너무 초라하고 내세울게 없어서 내 자신이 정말 작게 보이면 그 땐 어떻게 하니? 난 앞으로 살아갈 꿈도 희망도 없어지는 거잖아. 그래서 만나고 싶어. 만나서 뭐랄까 내가 그 동안 잘못 살지 않았다 확인하고 싶어.?????
노래17 꿈이란 무엇일까 – 은정 / 합창
꿈이란 무엇일까 내겐 잊혀진 단어 희망이란 단어 역시 내겐 아무 의미 없어
설레임 기대 흥분 가슴 뜀 같은 단어들은 이미 아무 의미 없어져 버린 나는 아줌마니까
지난 시간의 후회와 나의 어릴 적 아쉬움 후회는 없어 그건 나의 선택이니까
그러나 뒤를 돌아보면 지난 날을 돌아보면 무언가 잃어 버린 것 같은 나의 지난 날
그래 이해해 니 마음을 니 마음 충분히 이해하지 이해해
누구나 과거의 아쉬움을 간직하지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 지난 일
이제 남은 날을 생각해 생각해 앞으로 펼쳐질 날들을 생각해
그러나 다시 경험할 수만 있다면 그 옛날 가슴 뛰던 흥분 다시 경험할 수 있다면
지난 시간들 모두 나의 삶이었다고 잘 살아왔다고 자신있게 말할텐데
은숙
(은정에게) 너, 잘 생각해라.
미선
그래, 조심해,
진선
그런데 그냥 옛 친구 한 번 만나는 걸 가지고 너무 유난 떠는 거 아니니?
은숙
유난 떠는 게 아니야. 아 그럼, 여기서 자꾸 말 길게 할 필요 없이 말 나온 김에 우리 이 자리에서 직접 그 남자를 한 번 만나 보자.
미선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진선
어머 어머 그러자.
은숙
오케이. 자, 남자 등장!
조명 바뀌며 남자 등장.
은숙
(은정에게) 가봐. 잘해!
은정
(앉는다.)
남자
오랜만..이다. 하나도 안바뀌었네.
은정
호준씨도 여전하네.
정적
남자
어떻게 지냈어?
은정
그냥 그렇게 잘 지냈지. 호준씨는?
남자
나도 뭐 그냥…
정적
남자
정말 오랜만이지?
은정
한 십 년도 넘은 것 같네.
남자
그러게. 그 때는 삼십 대였는데.
은정
참 오래 전 얘기 같아.
남자
맞아. 오래 전 얘기. 정말 먼 아주 오래 전 얘기지.
정적
남자
(불쑥) 그때 일 기억해?
은정
응?
미선 둘 사이에 불쑥 끼어들며
미선
추억 얘기는 조심해야 해
은정
(알았다는 제스처로 미선을 밀어 내고)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남자
그때, 몽쁠리에.
은정
아-
은숙
(불쑥 끼어들며) 그다지 할 얘기도 없으면서 뭐하러 만나니?
진선
(은숙을 끌어 당기며) 야, 너 조용히 못해? 처음엔 그렇지 뭐,
남자
기억해? 그 아름다운 바다 빛
은정
아
남자
신이 이 지구상에 만들어 놓은 가장 아름다운 색깔이라고 했지
은정
아
남자
그 에메랄드 빛
은정
아
남자
지중해
은정
아
은숙
(살짝 흥분돼서 불쑥) 그 “아”소리 그만 하고 뭐라고 좀 해 아, 답답해 너 이리 좀 와 봐.
미선
그래. 나와 봐.
은정
(남자에게) 잠깐 화장실 좀…
옆으로 움직이고
은숙
아니 너 뭐하러 나왔니? 만났으면 뭔가 얘기를 해야 할 것 아니야. 그렇게 “아”만 하려면 이제 그만하자.
미선
가만 있어봐. 원래 저 상태가 되면 저렇게 서로 할 말이 없고 입술이 마르고 하는 거야. 저런 어색한 분위기 저게 정상이라니까.
진선
하여간 나도 좀 답답하긴 하다. 그렇게 해서는 뭐 아무런 일도 없을 것 같은데.
미선
그럼 넌,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거니?
진선
그럼 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거야? 아니 사랑하던 남녀가 10년 만에 만났는데 어떻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어.
미선
그건 과거 얘기지. 현재가 아니잖아. 과거는 과거야. 흘러간 물은 흘러간 물일 뿐이라고.
진선
그렇지만 흘러간 물도 증발해서 다시 수증기가 돼서 내게 떨어질 수 있는 거야.
미선
너 이상하다. 꼭 얘가 뭔가 일을 저지르기를 바라는 것 같다.
진선
아니야. 단지 나는 좀 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져 보자는 거지.
은숙
아니, 왜 너희들이 흥분이니? 지금 이 얘기의 주인공은 너희들이 아니고 은정이야. (은정에게) 하여간 제발 앉아서 뭔가 얘기를 좀 해.
미선
이제 얼굴 봤으니까 됐지. (남자에게) 자, 이제 들어 가세요.
진선
안돼. 시작한 일이니까 끝을 봐야지. (남자에게) 기다리세요.
미선
어차피 은정이는 별로 할 얘기도 없잖아.
진선
시작은 원래 그렇다며. 저런 어색한 분위기가 정상이라며.
은정
그만. 알았어. 알았어. 이제 날 좀 가만히 놔둬.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다시 앉는다.
은정
정말 오랜 만이야.
남자 그래.
은정
내가 먼저 들어온 이후에 오래 동안 더 있었네.
남자
그렇지.
은정
공부는 다 마치고?
남자
그렇지.
은정
결혼도 하고?
남자
그렇지.
은정
내 생각도 가끔 했어?
남자
그렇지.
은정
가끔 보고 싶었어?
남자
그렇지.
은정 나도 가끔 생각이 났어. 지금은 다 잊고 있지만.
남자
즐거웠던 시간이었지.
은정
아니. 즐거웠다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었던 그런 뭐랄까… 따뜻한 시간이었지.
남자
나 때로는 은정씨를 원망도 했어.
은정
나도 그렇게 마음이 편한 것 만은 아니었어.
남자
내 주변에 남아 있는 은정씨 흔적들, 나만 남아 있고 은정씨는 떠났으니까 떠나면서 남겨 놓은 것들,아마 떠난 사람은 남아있는 사람의 아픔을 잘 모를 거야. 떠난 사람은 떠나면서 그냥 떠나게 되지만 그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은 그대로 남아있으니까. 시간도 공간도 모든 것은 그대로 남아 있고 거기에 떠난 사람의 자리만이 비게 된 거지. 추억도 모두 그대로 남아있고. 함께 갔던 여러 곳들. 모든 것은 다 그대로 있지. 단지 이제는 나 혼자 그곳을 다니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은정
많이 괴로웠어?
남자
그렇지.
은정
그런데 우리가 왜 헤어지게 됐지?
남자
글쎄. 우리가 서로를 싫어하고 미워했던 것도 아니었고.
은정
그랬다면 이렇게 다시 앉아 있지 않겠지.
남자
은정씨하고 연락이 된 이후에 다시 한번 우리가 왜 헤어지게 됐는지 생각해 봤어. 간단하다면 간단한 이유고 …
미선
(또 다시 불쑥 끼어들며) 잠깐.
진선
뭐야. 왜 그래? 얘기 잘 진행되고 있는데.
미선
(은정에게) 화장실!
은정
나 화장실 좀 잠깐.
은정 일어나 옆으로
은정
왜그래? 이제 한참 제대로 얘기가 시작되려는데.
미선
왜 그런 얘길 하니?
은정
무슨 얘기?
미선
왜 헤어지게 됐느냐? 이런 얘기.
은정
글쎄. 무심결에 나온걸 가지고. 그리고 사실 나도 그게 궁금하긴 했거든. 지금도 그때 우리가 어떻게 헤어지게 됐는지 잘 기억이 안나. 그냥 내가 먼저 들어왔고 그리고 한 동안은 서로 전화도 하고 편지도 많이 썼지. 그런데 갑자기 저 사람이 한 두어 달 연락을 하지 않은 적이 있었어. 그리고 그렇게 끝이 난거야.. 이유도 없이. 그래서 사실 그때 왜 연락이 끊어졌었는지를 알고 싶어.
미선
알면?
은정
알면? 알면은 무슨 알면. 그냥 알고 싶다는 거지.
미선
그래 알아서 뭘 어쩌겠다고?
은정
아니 그냥 알고 싶다는 거야. 알아서 뭘 어쩐다는 것이 아니라
진선
그래 한번 물어봐라. 아니? 혹시 그때 다른 여자라도 만나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거잖아.
은정
그렇겠지? 한번 물어봐서 확인이라도 해 두는 것이 마음이 개운하겠지?
진선
그래. 확인을 해 봐.
미선
안된다니까. 만일 그랬다가 정말 뭐랄까 예를 들어 그러니까 저기 있잖아 그 뭐냐 거시기 그거 그 저 그러니까 말이야 그 그 거시기라면 어떻게 할건데?
은숙
야, 그게 무슨 말이냐? 그래서 뭐란 말이야?
은정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았다. 그 거시기면 어떻게 할거냐는 말이지?
미선
그래.
은정
글쎄. 그 다음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도 일단 확인이라도 해 보고 싶어.
은숙
그래 그러면 일단 가서 확인을 해봐.
은정 다시 이동한다.
은정
한 가지 묻고 싶은게 있는데. 그때 호준씨가 한 두어 달 연락이 안된 적이 있었잖아. 기억해?
남자
기억하지. 지금도 뚜렷하게 머리 속에 남아 있는데.
은정
그럼 왜 연락이 끊어졌었어?
남자
사실, 사실,
은정
사실?
노래17 잊고 싶었어 – 남자
잊고 싶었어 모든 것을 지우고 싶었어 당신의 존잴
이미 떠난 당신 내 곁에 있지 않은 당신
내게 남겨진 당신 모습 함께 했던 수 많은 추억들
벗어나고 싶어 이 모든 것에서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했던 당신 떠나간 당신 당신은 떠난 사람 난 남겨진 사람
잊고 싶었어 당신의 존재를 이미 떠난 내 곁에 없는 당신
이미 날 떠난 당신
은정 
호준씨….
미선 또 불쑥 끼어든다.
미선 
안돼!!!
은정 
저 화장실 좀 한번 더…
은정 다시 빠진다.
미선
거봐. 거시기 하잖아. 저러면 안된다고. 스토리가 저렇게 진행되면 곤란하다니까.
진선
야, 저 사람 널 많이 좋아하긴 했었는가 보다. 나도 저런 남자가 하나라도 있었더라면.
은숙
염병.
진선
뭐라고?
은숙
그래 있었으면 어쩔건데. 아줌마 다 돼서 몸매 퍼지고 뱃살 늘어져서 만나서 뭘 어쩔거냐고? 청춘이라도 다시 불사르겠다는거야 뭐야?
미선
안돼 안돼. 저런 스토리로 얘기가 진행되면 곤란해. 저러면 진짜 너 바람난다. 너 저 얘기 들으니까 어떠니? 자꾸 떨리지? 옛 생각도 막 나고? 안돼. 절대로 안돼!
은숙
안되긴 뭐가 안되니? 좀 떨릴 수도 있는거지.
미선
그러다 바람이라도 나면 어떻게 해?
은숙
그래 바람이라도 나면? 이 나이에 너 저 남자하고 둘이 새살림 차릴래?
은정
아직 미래 얘기는 할 필요가 없어. 이제 만났는데 왜 니들이 먼저 앞서가면서 소설을 쓰니?
미선
아니야. 옛 추억으로 돌아가면 그때 기억으로 돌아가서 그때 관계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구.
은정
그런데 옛 친구를 만나면 옛 추억 얘기를 하는게 당연한거 아니야?
미선
단순하게 옛 친구가 아니잖아. 옛날에 단순한 친구관계가 아니었잖아. 그럼 다시 그 관계를 복원하겠다는거니? (남자에게) 자, 남자 퇴장.
남자 어정쩡하게 퇴장한다. 그 뒤를 은정과 진선 아쉽게 바라본다.
미선
(은정에게 매우 강한 어조로) 너 저런 얘기가 안 나온다고 장담할 수 있어? 그리고 저런 얘기가 나오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다고 장담할 수 있어? 안돼. 절대로 만나면 안돼.
진선
아니야. 일단 마음을 열고 한번 만나봐라.
미선
안돼.
진선
만나봐.
은숙
그래 만나보는 것도 좋겠다.
미선
안돼.
진선
왜 안돼?
은숙
아닌게 아니라 만나는 것도 조금 그렇다.
미선
그렇지 안된다니까.
진선
한번 만나보는 것도 좋잖아.
은숙
그래 한번 만나봐라.
미선
안된다니까, 그러다 사고 난다고.
은숙
그렇겠다. 너 잘 생각해야겠다.
진선
아니야 너만 조심하면 아무 문제없어.
은숙
그 말도 일리가 있어. 너 하기에 달려 있으니까.
미선
그렇지 않아. 과거는 과거로 묻어.
은숙
그래 묻어라.
진선
한번 만나봐.
은숙
그래 만나봐라.
미선
안돼!
은숙
안돼.
진선
돼!
은숙
돼.
미선
(은숙에게) 야! 넌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진선
그래, 도대체 만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은숙
아니 왜 갑자기 나한테 뭐라고 하니?
미선
니가 지금 가운데서 이랬다 저랬다 하고 있잖아.
은숙
아니, 나는 그냥,
진선
그래서 어쩌라는 얘기야?
은숙
왜 나한테 뭐라고 그래?.
미선
그럼 니가 지금 제대로 하는 거냐구?
은숙
내가 뭘 제대로 안했어?
은정
(꽥) 그만, 그만, 그만 해! 도대체 너희가 친구가 맞니? 어쩌라는거야? 만나라는거야? 말라는거야?
은숙
그래. 그러니까 결론이 뭐야?
미선
그러니까 결론은 뭐냐하면
진선
만나라.
미선
안된다고.
은숙
그래 참아라.
은정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어휴, 정말 아줌마들 수다 못들어 주겠다. 오히려 스트레스만 더 받겠다.
은숙
아니 그러니까 내 얘기는…
은정
그만해. 그만해. 야~호. 야~~호. 
미선 
그렇지 참. 우리가 지금 산 꼭대기에 와 있지. 야호라도 한번 해야지. 모두 (기분 좋게 웃으며) 야호~
은숙
은정아. 20년 만에 올라와서 숙제만 하나 더 늘었구나.
은정
그래 내가 해결해야지. 근데 너 아까 오늘 이곳에 온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하지 않았니?
은숙
또 다른 이유? 그래. 사실 그때 얘기는 안했지만 나 그때 여기 올라오기 전에 고등학교 친구 하나 먼저 보냈어. 그 때 나 여기에서 다짐했어. 그 친구 몫까지 열심히 살겠다고. 그런데 오늘이 가까워 오니까 점점 초조해 지는 거야. 내가 지금까지 정말 잘 살았나. 아쉬움이 너무 많은 건 아닌가? 그래서 반성해 보고 싶었어. 그 친구에게 떳떳하고 싶었어.
미선
그래. 반성은 했니?
은숙
반성? 했지. 우리 지금까지 했던 모든 얘기들. 그게 다 나 자신을 반성하는 이야기 아니니?
미선
남자들 미워하고
은정
갱년기라는 이유로 피하기만 하고
은숙
직장 동료에게 좀 더 잘해 주지 못하고
은정
남편에게도 더 따뜻하지 못하고
미선
아이들에게도
은숙
남에게 의지하려 하고
은정
과거에 집착하고
미선
사소한 일들로 남들 미워하고
은정
우리 잘못한 것 많구나.
은숙
(조심스럽게 산을 향해) 선희야! 내 친구 선희야. 내 말 듣고 있니? 나 여기 왔어. 널 생각하며 열심히 살려고. 더 열심히 살게. 앞으로 더 열심히! 선희야!!!!
노래18 그래 맞아 – 은숙 / 합창
그래 맞아 그 말이 맞아 모두에게는 각자의 고민이
쉽지 않은 세상 누구든 편하지 않아 모두에게는 각자의 고민이
우리의 고통과 한숨으로 우리의 기쁨과 웃음으로 만들어지는 이 세상
그래 맞아 그게 바로 삶이야 그래 맞아 그게 바로 삶이야
은숙
자. 이제 내려 가자. 저 삶 속으로! 남편에게 따뜻하고 맛있는 밥 지어주러. 그리고 또 왕성하게 호르몬 분비하면서 열심히 살아야지. 우리 아줌마 아니니?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감한 아줌마! 호호호.
은정
그래. 아쉬움은 아쉬움이고,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또 잊을 일은 잊을 일이니까. 나 돌아가면 남편에게 정말 따뜻하게 맛있는 밥 지어 줘야겠어.
진선
그리고 우리 약속하자. 10년 후 오늘 다시 여기 올라오기로!
미선
은정 그래. 10년 후 오늘!
은숙
자 이제 가자.
모두
오케이!
모두 퇴장하고 은정은 남아서 운동화 끈을 묶는데 전화. 은정 전화를 보고 망설이다가
은정
어떻게 하지? (객석을 보며) 어떻게 할까요? 
암전. 조명 다시 인되며 내려가는 모습.
노래19 야호 / 합창
산이 우릴 불렀다 무언가 가슴에 품고
커다란 가슴으로 우릴 여기로 불렀어
산이 우릴 불렀다 아픔은 다 털어 놓으라고
우리를 울게하고 웃게도 하고 파랗게 멍든 가슴
산에다 묻으라고 니가 다 가지려고 산이 우릴 불렀어
우린 여기왔다 우리 아픔을 묻으러 우리의 아픈가슴 모두다 가져가렴
우리는 풀었다 우리의 가슴을 열었다 우리는 여기와서 아픔을 묻었다
야호야호 우리의 이 산을
끝.